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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윤리적 회복을 위한 쓴소리: “타락한 한국교회, 역겨운 냄새가 난다”

맘사라 2014. 4. 15. 12:06

“타락한 한국교회, 역겨운 냄새가 난다”

한복협 월례발표회서 교계 지도자 쓴소리… 성경적 신앙 회복 촉구

크로스로  |  webmaster@crosslow.com승인 2014.04.11  20:15:53  

총체적 위기에 봉착한 한국 교회. 그러나 교회 안팎의 거센 비판과 조롱에도 변화될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신앙적인 모습을 세상이 이해할 수 없어서 욕을 듣는게 아니다. 세상에서도 지켜지는 윤리가 당연히 지켜지고 실천되어야 할 교회 내에서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교회 안팎의 비판과 비난의 목소리, 욕은 한가지다. 어떻게 목사가, 어떻게 성도가, 어떻게 한국 교회가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윤리적 실천이라는 소중하고 고귀한 모습을 휴지통에 휴지 버리듯이 하면서 전혀 지키지 않느냐는 것이다. 결국 한국 교회는 현재 세상으로부터 악의 집단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김명혁 목사, 이하 한복협)가 지난 11일 오전 7시 강변교회(담임:허태성 목사)에서 ‘한국 교회 윤리적 삶을 진단한다’를 주제로 개최한 월례발표회에 발제자로 참석한 교계 지도자들은 한국 교회의 윤리적 실천을 촉구했다. 현재 한국 교회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도 거셌다.

   
▲ 한복협이 개최한 월례발표회에 참석한 교계 지도자들이 한국 교회의 비윤리적 삶의 모습을 지적하며, 성경적 신앙의 회복, 기독교 윤리의 적극적인 실천을 강조했다. (좌측부터 임석순, 손인웅, 전병금, 정주채, 지형은 목사, 사진은 데오스앤로고스 DB)

# 임석순 목사, “돈의 굴레에 빠져 역겨운 냄새가 난다”

발표회 전 진행된 기도회에서부터 쓴소리는 터져 나왔다. ‘십자가의 복음을 놓치면 타락한다’는 제목으로 메시지를 전한 임석순 목사(한국중앙교회)는 “기독교신앙의 목표는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성장을 일차적인 목표라고 생각하고 경쟁하듯 달려왔다”며 “결국 성장주의, 번영신학, 개교회주의, 외형주의, 물질주의 등의 문제가 터지는 것을 보고 ‘잘못 달려왔구나’고 고백하고 있다. 이는 잘못된 목표를 향해 출발한 결과로 당연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임 목사는 “언제부터인가 목회자들이 재물에 눈을 돌리고, 돈과 관련된 문제가 독버섯처럼 퍼져 나갔다. 무한성장 가도를 달린 한국 교회에는 언제나 ‘돈’문제가 혹처럼 따라 붙었다”며 “대형 교회나 중소형교회 모두 ‘돈’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저마다 역겨운 냄새를 풍겼다”고 비판했다.

특히 “재정권을 두고 갈등을 일으켜 교회가 분열되는 일이 흔해졌고,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목회자, 개인의 영달을 위해 밑 빠진 독처럼 빠져 나가는 누수 현상이 심해졌다”며 “이미 너무 멀리 왔다. 하지만 이제라도 되돌아가야 한다. 잘못 왔다는 것을 깨닫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희생하고 대가를 치룰 때, 한국 교회는 다시 회복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임 목사는 “어디로 되돌아갈 것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목표를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장하는 것, 성화되는 것을 원하신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며 “주님의 마음과 생각을 닮고 따라야 한다. 돌아가는 길은 오직 주님을 닮아가는 것 외에는 없다. 곧 십자가를 붙잡는 것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이어 “십자가에 나를 못 박고 십자가를 통해 내 자아를 죽이면 내 탐심, 내 욕심이 죽는다. 십자가는 죽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십자가를 놓치게 되면 타락이다. 십자가를 놓치면 욕심, 이기심, 탐심으로 갈 수밖에 없다. 타락의 본질은 탐심, 우상숭배와 같다”며 “깨달은 우리부터 십자가를 짊어지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한국 교회의 개혁이 일어나도록 하자”고 피력했다.

한편, 손인웅(덕수교회 원로), 전병금 목사(강남교회), 정주채 목사(향상교회 은퇴), 지형은 목사(성락성결교회), 케시 카스텐 목사(국제스포츠연맹 대표) 등은 발제자로 나서 △힘의 남용에서 벗어날 것 △개인적, 사회적 영성 회복할 것 △예수 그리스도가 주되심의 신앙 회복할 것 △성경적 믿음 실천할 것 등을 촉구했다.

다음은 주요 발제자들이 한국 교회를 향한 따가운 일침과 회복을 위한 제언의 발표를 요약 정리한 것이다.

# 손인웅 목사, “윤리적 실패는 힘의 남용 때문이다”

1. ‘힘(권력)’은 개인과 공동체와 세계를 지탱하고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지만 그 힘을 남용하지 않고 선용할 때에만 인류의 행복과 창조주의 영광을 위한 공동선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힘을 선용하지 못하고, 남용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던 삼손의 모습과 비슷하다.

2. 삼손의 힘은 하나님께서 선용하도록 주신 은사였다. 하지만 그는 물리적 힘을 남용했고, 경제적인 힘도 잘못 사용했다. 정욕을 다스리지 못하여서 실패의 올무가 되었고, 나실인의 거룩한 은사와 영력을 오용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에게 나실인의 언약을 주심으로 모든 능력의 통로로 삼으셨다. 그러나 삼손의 영적인 타락이 그의 윤리적 실패와 그의 가정과 삶의 파탄을 초래하였고, 종래에는 육체의 모든 능력마저 거세당하고 총체적이고 전인적인 탕자로 전락하였다.

3. 그러한 내리막길을 질주하는 과정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시시때때로 그를 붙들어 주셔서 일시적으로 필요한 능력을 회복시켜 주셨지만 굴러 떨어져가는 그의 죄성이 그를 끌고 감으로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4. 나실인 삼손은 브레이크가 파열된 욕망의 열차를 타고 내리막길을 끝없이 질주하다가 결국 자신의 능력 출처의 비밀을 누설함으로 머리가 깎이고 두 눈이 뽑혀서 나실인에게 내리시는 모든 능력을 박탈당하고 쇠고랑을 차고 육중한 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람 나실인 삼손은 육체의 힘도, 경제적 힘도, 가정의 행복도, 성적인 정욕도, 나실인으로서의 성직도 몽땅 박탈당하게 되었다.

5. 하지만 실패한 삼손의 최후는 아름다웠다. 삼손은 대담하게 죄를 범하였지만 대장부답게 죽음으로 회개도 철저히 하였다. 삼손은 진정한 참회는 죽음으로 해결하는 것임을 가르쳤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게 한다. 삼손과 같이 겁 없이 죄를 범하는 종교지도자들도 삼손 같은 회개를 한다면 세상은 틀림없이 새로워지고 희망의 날이 밝아올 것이다.

6. 목회자들의 힘의 남용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 자신에게 부여된 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의 사용에 대해서 주기적으로 진단 평가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델로 삼아 절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께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십자가상에 뛰어내릴 수 있는 상황에서도 최후의 유혹을 이기시고 아버지 뜻에 순종하신 절제된 힘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선한 일을 위해서나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해서는 그의 힘을 단호하고 강한 모습으로 선용하셨다.

7. 권력의 자기중심성과 제도교회의 권력이 강화되면 집단적 자기중심성이 증폭되고 지도자가 물리적 힘을 의존하는 경향이 심해진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 때 교회 자체가 갖는 강제력 때문에 파괴적인 힘이 강하게 발동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자정능력이나 순수한 사랑이라는 도덕적 호소 내지는 합리적 설득으로 비정상적으로 확장되는 이기적이고 강제적인 힘을 제어하거나 견제하기란 매우 힘들게 된다.

8. 목회자는 순간에 살면서도 영원 속에서 살아가는 여유를 가지고, 마라톤 경주와 같이 목회를 하는 것이 좋다. 또한 흐르는 물에 빵을 던지는 사람과 같이 멀리 보는 눈을 가지고 목회를 해야 한다. 목회자의 궁극적인 목표로 하나님 앞에서 좋은 평가는 받는 것이어야 하고, 자기가 섬기는 교회가 주님 앞에서는 단장한 신부가 되어 칭찬받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한다.

# 전병금 목사, “수준 이하의 집단, 절망스럽다”

1.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언행의 불일치’와 ‘교회 내의 비리와 부정부패’가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윤리적으로도 흠이 없어야 할 교회가 이제는 오히려 ‘수준 이하의 집단’으로 비춰지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절망스러울 뿐이다.

2. 이러한 상황은 성도들보다는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들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일반인들에 비해 목회자는 더욱 높은 수준의 도덕성이 요구된다. 그런데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기는커녕 일부 목회자들의 배임, 횡령, 탈세, 불륜 등으로 목회자 전체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으니 실추된 신뢰도를 회복할 길이 요원하기만 하다. 이에 대한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3. 지금까지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일부 몰지각한 목회자들의 개인적인 일탈로 치부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안일한 인식은 사실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못한 채 개인의 극적인 회개만 기대할 뿐이었고, 하나마나한 ‘회개 퍼포먼스’만 양산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더 이상 ‘립서비스’로 만족해선 안된다. 뼈를 깎는 자기갱신 노력과 거룩성 회복, 그리고 한국교회 전체를 향한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한다.

4. 한국 교회는 거의 ‘개인적 영성’ 즉, ‘행함’이 없는 ‘믿음’만 강조해왔다. 그 결과 개인적 신앙생활과 교회중심의 활동에는 적극적인데 반해, 크리스천으로서 사회적 책임은 상대적으로 등한히 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는 교회에서 ‘사회적 영성’을 전혀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영성’이란 개인의 체험적 영성이 사회적 공공성을 띤 형태로 표출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서도 정의, 평화, 창조질서 보존 등의 윤리적 차원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5. 우리는 ‘나 하나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쓰러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야 한다. 또한 한국교회의 회복도 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실천해야 한다. ‘사회적 영성’을 회복하고, 윤리적인 크리스천의 삶을 실천하면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며, 자기를 쳐서 주님의 말씀 앞에 복종시켜야 한다. 그래야 주님의 교회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 정주채 목사, “복음전도보다 윤리운동을 해야 할 상황이다”

1. 한국 교회는 복음전도보다 윤리운동을 먼저 해야 할 상황이다. 약 100년 전 부크만(Frank Buchman, 1878~1961) 목사가 일으켰던 도덕재무장운동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간절한 요망일 뿐 아니라 교회적 사회적 요청이다. 이는 윤리가 기독교신앙의 주된 목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한국 교회는 기독인들, 특히 목사들의 추락한 윤리생활로 인해 복음전도의 문이 닫히고 있기 때문이다.

2. 윤리는 신앙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존재와 계시에 대한 믿음 없이는 윤리는 그 설 자리조차 찾을 수 없다. 윤리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신앙고백에서 시작된다. 윤리문제를 다룰 때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일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신앙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신앙고백이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것이 없으면 윤리의 기초도 없어지고 윤리적인 삶의 궁극적인 의미도 없어진다.

3. 윤리란 주로 인간관계에 주어진 도덕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으면 윤리의 기준이 없어 사람들은 자기중심으로 기우러지거나 환경과 상황에 따라 그 기준이 바뀔 수밖에 없다. 거듭 말하지만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신앙고백은 윤리의 기초이며 기둥이다.

4.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킨 중보의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모양이 보여주는 대로 그는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셨고, 또한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를 회복시키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윤리의 기초라면 그의 십자가는 윤리적인 삶을 뒷받침하는 힘이다.

5.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범사에서 최종결정을 자신이 하게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는 무법자이다. 그러나 비록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영접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진실한 믿음과 합당한 경외심을 갖지 못했을 땐 무법자처럼 되어 그리스도를 자주 반역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우리의 신앙과 태도가 윤리적인 삶의 시금석이다.

6.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시며 만물의 통치자이심을 진심으로 믿고 경외할 때 윤리적인 생활이 보호되고 증진된다. 말을 바꾸어 하면 윤리적 타락은 바로 신앙의 타락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7. 윤리적인 타락은 곧 신앙의 타락이다. 그 열매로 나무를 안다하였으니 한국교회의 윤리적 타락은 그 나무인 교회가 어떤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신앙의 약화가 교회의 치리권 상실을 초래했다.

8. 교회가 치리의 권위를 잃게 되니 신자나 목사들도 결국 정부의 사법기관에 호소하게 되고 결국 세상이 교회를 다스리는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요즘은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사법기관을 의존하는 이들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요즘 한국교회의 치리회는 노회나 총회가 아니라 법원의 판사들이다."라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경외심이 없으면 교회는 무법천지가 될 수 있다.

9. 둘째,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신앙의 약화가 담임목사직 세습으로 나타났다. 담임목사직을 대물림하는 일반적인 이유는 욕심이다. 대물림하는 목사들이 여러 가지 이유들을 갖다 붙이지만 실제로는 세속적인 정욕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자신이 이룩한 업적과 영광을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자기가 모운 재산을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넘기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처사이다.

10. 대형교회가 생겨나는 것은 목사의 세속적 욕망 때문만은 아니다. 목사가 유능하고, 영성이 높고, 말씀에 은혜가 있고, 출중한 리더십이 있을 때 교회는 부흥하고 성장하게 돼있다. 그런데 목사와 교회가 특별히 경성해야 할 때가 바로 이런 때이다. 교회가 성장할수록 확인하고 강조해야 할 신앙고백은 교회의 주는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이다.

11. 교회가 크든 작든 교회의 교회다움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교인들의 충성에 달려 있고, 신자의 영적 건강 곧 성령으로 충만함도 그리스도의 주재권이 그 사람의 신앙과 생활 속에 어느 정도 확립돼 있는지 그 정도에 달려있다. 우리의 마음을 주재하시는 이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확신하는 사람은 그를 경외하지 않을 수 없고, 이런 경외심은 범사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를 자극하고 독려한다. 따라서 한국교회, 특히 목회자들의 윤리적인 실패와 타락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신앙의 약화내지 불신에 기인한다.

# 지형은 목사, “성경적 믿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1. 한국 교회의 윤리적 삶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 됐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윤리적 삶에 문제가 있는가?’ 하는 것은 우문(愚問)이 됩니다. 현실을 제대로 진단하려면 이렇게 물어야 한다. ‘한국 교회의 윤리적 삶에 문제가 있는 것은, 원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2. 믿음과 기독교적 실천의 관계는 전통적인 신학적 표현으로 칭의와 성화의 관계다. 기독교적 실천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행동의 동력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실천과 윤리적 삶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그것이 나오는 원천인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믿음은 좋은데 윤리적 삶이 나쁘다’는 논리는 신학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3. 오늘날 한국 교회가 침체에서 벗어나 갱신과 부흥을 경험하려면 ‘윤리적인 삶이 약하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근원적으로 ‘성서적 믿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믿음, 오늘날 삶의 현장과 역사적 흐름에서 강력하게 작동하는 바로 그 믿음이 약하다고 지적해야 한다.

4. 영성과 사회성, 믿음의 확신과 윤리적 삶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교회의 자기 정체성’이 영성 또는 믿음의 확신에 연관된 문제라면 ‘교회의 타자 연관성’은 사회성 또는 윤리적 삶의 문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다. 교회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타자 연관성을 실천한다.

5. 교회의 갱신과 개혁은 두 가지 방향에서 접근이 필요하다. 영성이라는 개인의 심령 변화와 사회성이라는 사회 구조의 변화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한 가지 근원에서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그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의 확신과 윤리적 삶은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에서 통전적인 구조로 작동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복음적 동력이 작동할 때는 늘 그랬다.

# 케시 카스텐 목사,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지 말라”

1. 기독교 윤리는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매일, 나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2. 기독교 윤리는 첫째,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감당하신 희생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과 분리시키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의도 대신 우리의 죄악된 본성이 윤리의 원천이 되어버린다.

3. 둘째, 기독교 윤리에 최우선적인 것은 이 세상의 양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다. 로마서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세상의 양식과 기독교는 달라야 한다. 새롭게 변화를 받았기 때문에 새로운 방법으로 생각하고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로마서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4. 셋째, 기독교 윤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공동체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도덕적 개인주의를 택할 때 도덕적 명확성도 잃어버리게 된다. 한 몸을 이루어야 할 지체가 서로 분리되면 도덕적인 명확성도 분리된다. 그래서 믿음의 공동체는 항상 연합체를 이루고 서로에게 배워야 된다.

5. 그런데 현재 우리는 서로 분리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할 기독교가 각각의 모임으로 분리되었다. 이제 기독교 공동체를 다시 발견해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 상호의존성, 투명성, 책임이 있고 서로에게 배워야 한다. 이는 진정한 제자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6. 넷째, 기독교 윤리의 핵심은 독특한 자기희생, 타인중심성,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기독교는 독창성인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지 말라’ 이것이 기독교의 사랑이다. 한국 교회들이 자신들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기독교의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7.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은 기대감이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사랑은 기대가 아니라 의도다. 기대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내게 만족을 주고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그러나 의도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향해 가지신 의도를 내가 채워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이다. 기대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사랑을 캐내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8. 다섯째, 기독교 윤리는 역경에 대한 독특한 접근방식을 가지고 있다. 바로 악을 선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성경은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저주하지 말라 악을 선으로 이겨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크리스천들에게 어떻게 하늘의 원리로 이 세상을 통치하는 지를 가르쳐야 한다. 이 세상에 대한 해결책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그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9. 여섯째, 기독교 윤리는 주로 가족을 통해 사회로 동화, 전달된다..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가 다 마찬가지) 아버지들이 신앙적인 도덕을 실제적으로 자신의 가정에 가져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0. 우리는 집안에서 기독교인으로 살기 전까지는 결코 기독교인으로 살지 못할 것이다. 한국의 미래에 부흥이 있다면 교회에서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 가정에서 시작될 것이다. 기독교 가정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면 부흥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본보제휴 / 데오스앤로고스 (www.theosnlogo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