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와 더불어 우리에게 친숙한 악기 바이올린은 현을 짚는 왼손가락이 조금만 틀어져도 쉽사리 소리가 흩어지는 섬세한 악기다. 그래서 바이올린을 한 지 40년이 넘었지만 결코 연습을 게을리할 수 없고, 틈틈이 책을 읽고 미술품을 감상하며 감수성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이경선 교수. 그녀의 음악인생을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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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가 프로 데뷔 20주년 이었던 이경선. ‘미국, 러시아, 독일, 벨기에 등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면서도 건강상의 이유로 연주회를 취소한 적은 한 번도 없다’며 밝게 웃는다. 기교가 화려한 연주자가 아닌, 청중의 내면을 울리는 연주자로 기억되며 여든 넘어서까지 무대에 서는 것이 가장 큰 꿈이다. | 리허설룸의 야전사령관 3월 14일 낮 1시, 예술의 전당 음악당 지하 1층 리허설룸에 3인의 음악가가 들어섰다.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IBK챔버홀 공연 준비를 위해 모인 것이다. 피아니스트 박종화. 독일 뮌헨 음대 최고연주자 과정을 졸업하고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인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최연소 수상, 그것도 최우수 연주자상을 받았다. 첼리스트 송영훈. 불과 아홉 살 때 서울시향과 협연할 만큼 일찌기 재능을 인정받은 그는 뉴욕 챔버 등 최정상급 오케스트라와 공연했으며, 지금은 경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둘 사이로 오늘의 주인공, 이경선이 보였다. <워싱턴 포스트>로부터 ‘정경화 이후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연주가’, 이른바 포스트 정경화라는 찬사를 받은 바이올리니스트다. 이날 세 사람이 연습할 곡은 체코 음악가 드보르작의 피아노 3중주 <둠키>, 슬라브 민족의 정서를 담은 명상곡이다. 음역이 낮은 첼로가 자아내는 우울하고 애수 어린 선율이 듣는 이의 마음까지 무겁게 하나 싶더니, 어느새 발랄하고 경쾌한 춤곡이 끼어들며 분위기를 들었다 놨다 한다.
“여기서 끝부분은 약간 길게 빼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송영훈) “이 파트를 연주할 때면 전 꼭 소설이나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에요.”(이경선) “여기 쉼표는 너무 오래 쉬면 안 되겠네요. 새로 연주가 시작되는 느낌이 드니까.”(박종화)
곡을 쓰는 것은 작곡가 몫이지만, 마디마디를 어떤 악상樂想으로 연주할지 해석하고 표현하는 것은 오롯이 연주자 몫이다. 틀에 매이지 않는 다양하고 자유분방한 해석과 토론이 오고가다가도, 일단 연주가 시작되면 각자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해진다. 그러는 동안 연주는 조금씩 무르익어가며 그 맛을 더해 간다.
세 사람 중 이경선이 유난히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것이 눈에 띈다. 오른손에는 활을 쥐고, 왼손으로는 현을 짚다가도 좋은 악상과 운지運指가 떠오르면 이를 놓칠세라 곧바로 연필로 악보에 옮긴다. 쉴 틈이 없기는 그녀의 스마트폰도 마찬가지였다. 제자들이 수시로 보내는 카톡메시지를 확인하며 레슨 일정 등 스케줄을 조절했다. 게다가 좀처럼 공개하지 않는 음악가들의 연습실에 생전 처음 초청받은 ‘클래식 문외한’ 기자가 쏟아내는 질문에 답변까지 해야 한다. 여느 사람이라면 정신이 사나울 법 하건만, 그녀는 1인 3역을 매끄럽게 소화해내고 있었다. 마치 어지러운 전장을 능숙하게 지휘하는 노련한 야전사령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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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올리니스트들은 항상 손 관리가 되어 있어야 한다. 바이올린 현을 짚는 기본기가 잘못된 사람은 손가락 겉이 굳어져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급기야 섬세한 연주를 할 수 없다고 한다. |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 더 강인한 잡초처럼 미 오벌린 음대와 휴스턴대 음대 교수를 거쳐 2009년부터 모교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인 이경선은 1964년생, 경남 삼천포의 어느 딸부잣집 셋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를 포함 네 자매 모두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이경선이 다섯 살 무렵, 가족은 마산으로 이사했다. 큰 도시에서 딸들에게 제대로 음악을 가르치고 싶었던 부모님의 결단이었다. 1960년대면 국민 대다수가 하루 끼니를 놓고 걱정하던 시절. 그러나 부모님은 수입 대부분을 아낌없이 딸들 교육에 ‘올인’했다. 주변에서는 ‘도대체 어쩌려고 저럴까?’ 하는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낼 정도였다. 예나 지금이나 금전적으로 뒷받침 없이 음악을 배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뒷바라지를 위해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보며 ‘열심히 해서 어려운 형편을 이겨나가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철이 일찍 든 셈이죠. 아마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더라면 저도 모르게 부모님을 의지하게 됐을 테고, 지금만큼 성장하지도 못했겠죠.”
유난히 어른스러웠던 어린 시절의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꼬마 경선이는 피아노 레슨선생님에게 “선생님, 딴따다다♩~ 딴따다다♪~ 이 음악 좀 가르쳐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딴따다다’란 다름 아닌 <결혼행진곡>. “그걸 배워 어디 쓰려고?” 선생님은 의아해하면서도 단음으로 된 <결혼행진곡>을 가르쳐 주었다. 곡이 어느 정도 손에 익자, 경선이는 집 앞에 있는 예식장에 찾아가 반주를 해 주고 수고비를 받았다. 피아노 건반 88개 너비를 합치면 어린 경선이의 키만큼은 됐을 것이다. 고사리 같은 두 손이 드넓은 건반 위를 힘겹게(?) 넘나들며 두드리는 상상을 해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녀가 피아노에서 바이올린으로 진로를 바꾼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피아노로 음악을 시작한 경선이는 또래보다 훨씬 진도가 빨랐다. 한 옥타브 넘게 차이 나는 건반들을 한 번에 두드리기엔 고사리손이 너무 작았고, 손이 클 때까지 피아노를 쉬기로 했다. 피아노와 그녀의 사이가 잠시 멀어진 틈을 타 끼어든 악기가 바이올린이다. 그렇게 연을 맺은 바이올린이 40년 넘게 함께하는 삶의 동반자가 되었으니, 그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까. 이경선에게는 넉넉지 않은 형편 외에도 핸디캡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지방 출신이란 점.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지금도 지방은 교육환경이나 문화적 여건 등에서 서울보다 열세인 것이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자식을 낳거든 서울로 보내라’는 말까지 있을까? 이경선이 서울에 갈 기회는 일 년에 한 번, 그것도 열흘 가량 음악캠프에 참가해 바이올린을 배우는 게 다였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몇 배 노력을 기울이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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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선 교수가 연주회를 앞두고 사용한 <둠키>악보의 일부. 악보에 적힌 숫자는 현을 짚는 손가락의 번호를 가리킨다고. | ‘콩쿠르 킬러’가 된 비결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 결실은 그대로 나타났다. 중학교 3학년 때 이화콩쿠르 바이올린부 1위, 육영콩쿠르 대상을 수상했다. 서울예고 2학년 때는 동아콩쿠르에 참가했다. 올해로 54회째인 동아콩쿠르는 국내 웬만한 음악가는 모두 거쳤다해도 과언이 아닌, 음악인의 등용문이다. 이 대회에서도 그녀는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1984년, 이경선은 서울대 음대 신입생이 되었다. 신입생들은 대개 미팅, 동아리 등 ‘캠퍼스생활’을 만끽하기 마련이지만, 이경선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언니들과 자취할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실기 장학금을 받아 학비 걱정은 덜었지만, 좋은 바이올린도 장만하고 싶었고 유학도 준비해야 했다. 알바로 초중고생들 레슨 일을 했다. 지금도 대학 친구들은 기억한다, 수업 마치는 종이 울리자마자 부리나케 강의실을 빠져나가던 그녀의 뒷모습을.
“동아리 등 음악 외의 활동은 거의 하지 못했어요. 공강시간이면 빈 강의실에서 연습에 열중했고요. 개인연습 시간도 부족한 마당에 레슨하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덕분에 가르치는 실력이 확 늘었어요. 그 경험은 훗날 교수가 되는 밑거름이 되었지요.”
1988년 서울대 음대를 실기수석으로 졸업한 이경선은 미국의 피바디 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곳에서 그녀는 다시 한 번 벽에 부딪힌다. 영어실력이 달려 교수들이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 교수들이 레슨 때 쓰는 영어는 ‘크게/작게, 천천히/빨리’ 등 단순한 말이 아니다. 전문용어에 이태리어나 라틴어까지 섞여 나오는 완전 고급영어였다. 그나마 직접 시범을 보이는 레슨은 사정이 나았다. 한국어로 들어도 쉽지 않을 음악사 수업을 듣고 밤을 꼬박 밝혀가며 레포트를 써 나갔다.
“어찌나 스트레스를 받았던지 바이올린 잘하는 사람보다 영어 잘하는 사람이 더 부러울 정도였어요. 교수님이 말씀해 주신 내용들을 모조리 녹음했다가 집에 가서 반복해 듣고, 그래도 모르는 부분은 친구들에게 물었죠. 특히 레슨 때 지적받은 사항은 다음 시간까지 반드시 고쳤어요. 교수님들이 제가 영어를 못 알아듣는 걸 눈치 채지 못하실 정도였죠, 하하하.”
특히 피바디에서 거장 실비아 로젠버그 교수를 사사한 것은 행운이었다. 여든을 바라보는 지금도 음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완벽한 연주를 구사하는 로젠버그 교수는 철저한 자기 관리의 표본이었다. 로젠버그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경선은 콩쿨에 도전할 의욕을 보였지만, 로젠버그는 ‘우선 기본기부터 다질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레슨 때마다 철저한 준비로 기량이 쑥쑥 자라는 그녀를 보며, 로젠버그는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누구보다 혹독한 트레이너가 되어 제자를 열성적으로 지도했다. 이경선이 1991년 한 해에 참가한 콩쿠르만 무려 10개나 된다. 거의 한 달에 한 번꼴이다. 콩쿠르 킬러란 별명까지 생겼다. 그녀는 왜 이토록 콩쿠르에 집착한 걸까?
“그게 든든한 후원자도 재력도 없는 제가, 자신을 사람들에게 빨리 각인시키는 유일한 길이었어요. 기량도 단기간에 빨리 늘고, 설령 수상을 못해도 그만큼 연주세계가 탄탄해집니다.”
수없이 콩쿠르에 나가는 동안 무대공포증도 사라졌다. 워싱턴 콩쿠르 1위, 모차르트 콩쿠르 2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동상 등을 차지한 ‘콩쿠르 킬러’의 비결은 무엇일까?
“콩쿠르에서는 대개 ‘옆에 있는 참가자가 경쟁상대’라고들 생각하는데 잘못된 거예요. 이겨야 할 대상은 자기 자신입니다. 심사위원 앞에서 중압감을 느끼거나 무대서 주눅이 들면 자신의 기량을 100%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 마음의 싸움을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지난 40여 년간 바이올린을 쉰 것은 한 달이 전부 여러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세계무대에 자신을 알린 이경선이지만, 콩쿠르에 대해 유쾌한 추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1993년 몬트리올 국제 콩쿠르, 이 대회에서 그녀는 3위에 올랐다. 콩쿠르 본선무대에는 쟁쟁한 실력을 갖춘 참가자들이 선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본선 진출자들끼리 서로 연주를 듣다 보면 ‘이 사람은 몇 등, 저 사람은 몇 등’ 식으로 윤곽이 잡힌다. 그런데 다들 등수 밖이라고 생각하던 어느 일본인 참가자가 1위에 오른 것이다. 당시 스폰서를 맡은 일본 기업들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출전했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일로 현지 신문에 자신의 이름과 사진이 게재되는 등 크게 주목을 받았고, ‘청중이 뽑는 상’까지 받아 그녀는 오히려 더 기뻤다고 한다. 소치올림픽 때의 김연아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스승 로젠버그처럼 여든까지 청중들에게 음악으로 감동을 전하고 싶다는 이 교수는 오늘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바이올린을 시작한 이래 지난 40여 년 동안 손에서 바이올린을 놓은 것은 딱 한 달, 딸을 낳고 조리를 하느라 쉰 것이 전부다. 한 달 만에 바이올린을 다시 쥐던 순간,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손끝의 감각이 다 사라져 버려서였다.
“두려웠어요. ‘예전에 내던 소리를 다시 낼 수 있을까?’ 하고요. 정경화 선생님이 쉰일곱 때 왼손에 부상을 당해 5년 동안 쉬셨다가 복귀하셨잖아요?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를 아니까 개인적으로 만난 자리에서도 ‘선생님 어떠세요?’ 하고 여쭐 수가 없었어요. 다행히 연습을 하다보니 감각이 조금씩 돌아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죠.”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문득 이경선 교수의 왼손을 보고 싶어 양해를 구했다. 육안으로는 일반인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지만, 만져보니 우유 표면에 생기는 막 같은 굳은살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2,3일만 연습을 걸러도 이 살은 사라진다고 한다. 종잇장에 살짝 베는 작은 상처만 생겨도 바이올린을 켤 수 없다.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왜 손을 생명처럼 다루는지 짐작이 되었다. 이윽고 사진촬영을 위해 챔버홀 무대 위에 선 그녀가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을 켜 보였다. 바이올린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연주해 봤을 만큼 흔하고 평범한 곡이다. 그러나 ‘저 음 하나를 제대로 내기 위해 적어도 수만 번은 활을 문질렀으리라’ 생각하니 <지고이네르바이젠>이 결코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인물사진 | 김학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