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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미래연구(오상훈 선교사의 추천의 글):한국교회, 미래동력·여론주도층·지지기반 상실

맘사라 2014. 12. 26. 08:59

한국교회, 미래동력·여론주도층·지지기반 상실

입력 : 2014.12.25 21:55   
현 시점에서 안티 크리스천 귀환운동이 갖는 의미 (1)

이 글은 임성택 박사(전 그리스도대학교 총장)님이 최근 (사)나눔과기쁨 주최 ‘한국교회를 위한 새로운 국내외 선교정책 및 청소년 부흥정책 설명회’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본지는 임 박사님의 동의를 얻어 이 글을 전재합니다. -편집자 주

현 시점에서 안티 크리스천 귀환운동이 갖는 의미

▲임성택 박사(전 그리스도대학교 총장).

1. 들어가는 말

최근 한국교회, 특별히 일부 대형교회들의 일탈은 결과적으로 젊은층들의 대거 교회 이탈을 불러왔다. 이는 현재의 한국교회에서도 참담한 일이지만, 단지 향후 10년 미래를 조망해 보아도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이는 한국교회의 현실과 미래를 걱정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인식이요 아픔일 것이다. 이 고통의 중심에는 교회를 이탈한 사람들 가운데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아예 무종교로 돌아가 버리지 않고 교회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면서 교회를 비난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소위 ‘안티 크리스천’(anti-christian, 이하 안티)들이 있다.

안티들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anti-christian, 즉 ‘그리스도교에 반대하는’ 혹은 ‘그리스도교의 반대자’라는 뜻이다. 더 깊이 영적으로 이해하면 적그리스도의 개념으로까지 확대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이 글에서 안티는 전술한 대로 “다양한 이유로 교회를 이탈한 사람들 가운데,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아예 무종교로 돌아가 버리지 않고 교회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면서 교회를 비난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로 정의하고자 한다.

이런 의미에서 안티를 구분하여 본다면 본질적인 안티, “소위 적그리스도의 성격을 지닌, 악질적이고 마귀적인 영적 세력들”과 “비록 교회를 떠났지만 교회에 대한 미련과 애정을 버리지 못한 채 중간지대에 머물고 있는 안티들”로 양분할 수 있다. 본고에서 이 두 세력의 분포를 객관적으로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전자의 악질적인 안티는 교회가 잘못하면 물론이고 아무리 잘해도 끝없이 반(反)그리스도적 악행을 반복할 것이기에 관심이 되지 못한다. 다만 후자의 안티들을 어떻게 하면 돌아오게 하여 한국교회의 성장동력의 새로운 불씨를 지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고자 한다.

이처럼 안티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대응은 그들을 이해하고 보듬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적그리스도의 개념으로 이해하여 그들과 충돌하는 배타적 자세를 견지하였음이 사실이다. 교회는 청년들을 무조건 세속적 문화와 단절시키려고 했고, 그렇게 사는 삶을 성결한 삶으로 미화하고 오직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에 몰두하게 했다. 그럼으로써 안티들에게 올바르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도 상실하게 하고, 나아가 안티들이 득실대는 세상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은 아예 가르치지도 않았다. 즉 교회 내에서 성실한 봉사와 헌신, 전도와 교육에 전념하게 하는 ‘신자화’에는 성공하였으나, ‘신자의 세속화’, 곧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는 ‘성도화’에는 실패하였다는 말이다.

본고는 우선 현재 한국교회에서 안티들의 성향과 규모, 그들의 활동에 대하여 점검하고, 그 다음에 그들이 안티가 된 근본적인 이유들에 대하여 분석하며, 마지막으로 그들의 귀환 가능성과 그것을 위해 한국교회의 해야 할 일들에 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이것에 관한 선행연구가 그리 많지 않지만, 최근 젊은 목회자들과 학자들에게서 나온 몇 편의 글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고 이들이 수집한 자료들을 당사자들의 허락을 받아 사용하였다.

2. 선행연구로서 ‘가나안 성도’에 대한 고찰

1) ‘가나안 성도’

우한별 현대목회와사역연구소장은 ‘가나안 성도’에 대하여 그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 동안 비공식적으로 ‘가나안 성도’라고 칭하여 온 분들은 목양의 대상에서는 제외되고, 교회의 ‘관심의 대상’보다는 ‘문제가 있는 사람들’, ‘교정의 대상’이라는 인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최근 2~3년 사이 『복음과 상황』이나『목회와 신학』 등에서 이에 대한 특집들이 게재되었고, 이에 대한 연구도 발표되면서 관심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우 소장이 소개한 청어람아카데미 양희송 대표는 제도권 교회 바깥의 가나안 성도에 대하여 “여러분이 교회 바깥으로 나가 있다면, 교회 안에서 쉽게 받을 수 있었던 조건들, 교육과 예배와 조직과 나를 붙잡아주던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 사라진다면, 그 이후에 나를 그리스도인 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붙잡아주는 핵심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교회 바깥에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일 수 있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도전하면서, 가나안 성도를 연구하는 것은 제도권이 주는 외형적인 것을 넘어 신앙의 본질을 명확하게 하는 논의로 발전될 수 있을 것이므로 단순히 새로운 신앙 행태가 발생하고 그것을 연구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가나안 성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본질적인 질문과 목회적인 책임을 인식하고, 무엇이 본질적인 신앙을 어렵게 하고 있는지, 교회는 본질을 추구하고 비본질을 제거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찰을 촉구했다.

2013년 4월 25일 명동 청어람에서 목회사회학연구소(조성돈·정재영 박사)가 “갈 길 잃은 현대인의 영성 – 소속 없는 신앙의 모습”이란 주제로 개최한 세미나에서 정재영은 “‘가나안 성도’라는 말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가지고 있지만 현재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찾아 다녔듯이 ‘새로운’ 교회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가나안’이라는 말을 거꾸로 읽으면 ‘안 나가’인 것과 같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 또는 의도적으로 ‘기성’ 교회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한다”고 했다.

논자는 이 조사와 연구결과를 그대로 인용하고자 한다. 이 조사에 의하면 교회를 떠난 316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에서, 현재 소속 없이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가나안 성도의 비율이 26%로 나타났다. 여기에 2013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의 조사에서 10.5%로 추정치가 나온 것을 근거로, 보고서는 가나안 성도의 대략적 추정치를 100만명 정도로 보고 있다.

2) 가나안 성도의 성향

 

3) ‘가나안 성도’가 주는 의미

이들의 신앙적 구조를 정리하면 (1) 상당한 기간 동안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2) 구원에 대한 확신을 경험하지 못하였고, (3) 상당수가 고교 졸업 이후에 이탈하였으며, (4) 신앙의 연조가 상당한 사람들의 이탈률이 높고, (5)목회자와 교회에 대한 불만, 그리고 신앙에 대한 회의가 이탈 이유의 절반을 차지하였으며, (6) 직분자들 이탈 원인의 거의 대부분이 목회자에 대한 불만이며, (7) 고학력자일수록 교인들의 삶에 대한 불만이 높으며, 100명 미만의 교회에서 문제가 없다는 비율이 가장 높고(63.1%), 불만사항의 각 항목에서 골고루 높은 선택을 받은 것은 중대형교회(300~999명)이며, 파벌 다툼은 1,000명 이상 교회에서 가장 높다는 것이다. (8) 그리고 이탈자의 상당수가 구원에 대한 갈망과 교회에 대한 애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은 있으나 교회 소속은 거부하며, 언젠가는 돌아갈 것이라는 전제 아래 교회 이외 신앙 모임에는 참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가나안 성도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근거로, 논자는 다시 안티의 문제로 돌아오고자 한다. 논자의 ‘안티’는 가나안 성도를 포함하고, 조금은 더 적극적으로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고, 또 실제로 그런 행동을 보이는 범주까지 확대한 개념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단순히 안티에 대한 염려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안티는 상당히 뿌리 깊은 우리 민족 고유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민족의 종교정서와 깊이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절대로 다른 민족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민족정서와 종교정서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이것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외래종교의 운명을 결정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 한국교회의 현실

1) 현재추진동력은 있으나 미래성장동력이 없다.

청년들이 특별히 많이 모이는 교회를 제외하고는 지금 거의 대부분 교회의 주축들은 50대 이상이다. 주일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중고등부 대학부·청년부는 존폐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그토록 활발했던 대학 캠퍼스 선교는 사그라진 지 오래며, 한때 붐을 일으켰던 군선교와 직장선교는 겨우 기존 선교단체를 통하여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교회는 주일학교를 포함하는 교회학교에 특별한 지원이나 관심을 갖지 않고, 교육전도사 찾기에만 급급하고 있다. 상당수의 담임목회자들의 인식 속에는 “교회학교는 교육목사 혹은 전도사의 몫”이라는 이상한 사고가 있다. 그리고 자신은 어른들, 특별히 헌금의 주축을 이루는 50대 이상의 제직들을 관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교육목사 혹은 전도사가 전담하는 것이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이들의 특징은 이동이 잦고, 그런 면에서 책임감 혹은 주인의식에 한계가 있으며, 특별히 개인의 역량 차이가 너무 커서 사역이 인수인계 과정에서 그대로 유지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교회들은 헌금 가능한 50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어 현상유지에는 별로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당장 10년 후 본인의 교회를 내다보면, 과연 누가 남아서 교회를 여전히 유지할 수 있겠는가 하는 심각한 문제의식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본인의 당대에는 별일이 없을 수 있지만, 10년은 금세 다가오는 짧은 시간임을 주지하여야 한다.

2) 여론주도세력의 지지를 잃었다.

지금 주된 기독교 비판세력이 누구인가? 그것은 대부분의 식자층과 진보 지식인들, 그리고 양심적 사회운동가들이고, 그들의 비판은 고스란히 평범한 국민들의 여론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에 대해 정확히 판단을 내리고 가치를 결정하는 일을 개개인 시민이 어떻게 하겠는가? 그것은 여론주도층의 몫이며, 기독교는 그들에게서 철저하게 외면당하였다. 그것의 이유를 굳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현실이며, 특별한 대책 없이는 이런 상태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3) 신앙적 기반세력의 지지를 잃었다.

우리 기독교의 신앙적 지지기반은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이었으며,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과 차상위계층이었으며,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민중들이었다. 우리 기독교는 이들을 기반으로 진보는 진보대로 보수는 보수대로 급격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고, 나름대로 국가적 차원에서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력한 구성원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교회의 대형화와 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그리고 무교적 기복신앙이 강단을 휩쓸면서, ‘교회는 부자들의 교회’ ‘상위계층의 사교장’ ‘권력자들의 정치 놀음장’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교회를 그렇게 이용했고, 그들을 맞아들인 교회는 ‘전통적 신앙지지기반’(약자들, 소외된 자들 등)에 대한 관심을 부담스럽게 여기기 시작했다. 이를 감지한 ‘전통적 신앙지지기반’들은 스스로 교회에 등을 돌리고, 교회를 대신해 자신들을 위해 함께 싸워줄 이들을 찾아 나섰다. 엄밀하게 말해서, 오늘날 이렇게 득세하고 있는 종북 정치세력과 급진적 진보세력을 키운 것은 교회와 재벌과 부자들이다. 교회가 그들을 버리지만 않았어도, 재벌이 중소기업을 조금만 더 배려했더라면, 부자들이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조금만 더 나누었더라면, 그들이 굳이 종북세력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급진적 진보세력과 종북세력은, 비록 정치적 목적을 가진 쇼라고 하더라도 그들 옆에 있어 주었고 그들과 함께 싸워주었다. 어디에도 기댈 데가 없는 소외된 자들이 그들이 내민 손을 잡은 것을 탓할 수 없는 일이며, 이들을 잃어버린 교회는 회개해야 할 일이요, 처절하게 울어야 할 일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