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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사모님들의 현실: 목사님, 아내에게도 봉사 좀 하시죠!

맘사라 2014. 4. 15. 09:28

 

목사님, 아내에게도 봉사 좀 하시죠!

  • 2011.09.28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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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사나 전도사의 아내(사모)는 대다수가 “나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 설문을 받은 369명 중 91.1%인 336명이 그렇게 답했다. 11명 중 10명꼴이다. 270명이 “그저 그렇게 산다”고 했고 나머지 66명은 “불행하다”고 했다. “행복하다”는 사모는 전체의 8.9%(33명)로 11명 중 1명 수준이었다. 기독교 가정상담기관 하이패밀리가 최근 전국의 목회자 아내를 대상으로 실시한 행복도 설문 결과다(본보 지난달 18일자 24면 ‘목회자 사모에게 행복 조건 물었더니’ 참조).

    사모로 사는 것은 사실 고생길에 가깝다. 목사의 아내이기 때문에 목사만큼의 희생을 강요받지만 아내일 뿐이어서 나서면 “감히 설친다”는 말이 쏟아진다. 목사인 남편은 아내가 하소연하면 “믿음이 약해서 그렇다” “기도를 안 해서 그렇다” “마귀가 틈타서 그렇다”고, 무관심하게 말하고 돌아선다.

    사모는 그래서 더 외롭고 숨 막힌다. 우울증 등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사모도 많다고 하이패밀리는 전했다. 녹록지 않은 목회자 사모의 삶을, 지금은 행복감을 회복 중인 사모들에게서 28일 들어봤다.

    벙어리 사모

    “말을 자유롭게 못하는 점이 가장 힘들었어요. 교인들이 목사님한테 못하는 말을 저한테 하는데 저는 말할 데가 없어요. 여자들은 말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잖아요. 같이 차 마시고 밥 먹고. 집사님끼리는 친한데 저는 끼지 못해요. 늘 선을 지켜야 해요. 교인들도 그걸 원하고요. 그러니 많이 외롭죠.”

    충남 서산 A교회 사모 서모(50)씨는 20년 넘게 꿀 먹은 벙어리로 살았다. 친근한 교인에게도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는 자리가 사모였다. 사모끼리도 웬만해선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지 않았다.

    교인들은 쉽게 말했다. 서씨의 일거수일투족에 토를 달았다. 서씨는 젓가락에 국수를 실타래처럼 감아 먹다가 “어디 어른 앞에서 그 따위로 먹느냐”는 할머니 권사의 호통에 눈물을 쏙 뺐다. 그 뒤로 1년간 국수를 못 먹었다. 또래 여집사는 대놓고 “사모님은 가정 중심적이라서 너무 싫다”고 말했다.

    “그땐 뭔 용기가 있었는지 ‘내가 가족을 행복하게 못 하면 남편도 교회를 행복하게 할 수 없지 않겠느냐’고 했어요. 얼마나 통쾌했는지 몰라요. 대부분의 사모가 가슴앓이를 많이 할 거예요. 제가 27년 했는데 크고 작은 일로 여전히 마음 다치고 숨죽이며 살아요.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럴 거예요.”

    목사의 방황

    서울 마포구 B교회 사모 김모(43)씨는 청혼 받고 3개월 만에 결혼했다. 그는 개척교회 주일학교 교사였고 남편은 중고등부 전도사였다. 사모가 어떤 자리인지는 몰랐다. 단지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남편이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서광이 비쳤다’고 하더라고요. 8살 차이인데 교회에 부임해 저를 보자마자 배우자라고 생각해서 보름 동안 금식기도를 했대요. 자긴 돈도 없고 석·박사도 아니기 때문에 비전(목표)이 맞지 않으면 중도에 포기할 수 있다고. 예전엔 사모들이 도망을 많이 갔대요.”

    교회 개척 4년 만에 교인들이 “교회가 작아 배울 게 없다”며 나갈 때 김씨는 자존심이 무너졌다. 교인들은 설교와 교회 운영 방식이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을 김씨에게 했다. 목사 귀에 들어가라고 하는 말들이었지만 김씨는 전할 수 없었다. 교인들은 목사에게 직접 불평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무능해 보일 때 속상했어요. 가장 힘든 건 남편이 자신을 제어하지 못할 때였어요. 강대상을 뻥 차면서 ‘나 목회 안 할래’라고 소리치기도 하고, 어린애처럼. 한 번은 ‘때려치우고 택시 운전사 할까’ 묻더라고요. 난치병으로 장애 판정까지 받았어요. 작년엔 제가 사모하기 싫더라고요.”

    실종된 신혼

    이모(48)씨는 경기도 군포 C교회 사모다. 1988년 서울의 한 교회에서 소개받은 신학교 졸업생과 결혼했다. 신혼 기분을 낼 새도 없이 시작한 교회는 열악했다. 부부는 예배당에 칸막이를 치고 잤다. 난방이 안 돼 한겨울엔 안팎이 똑같았다. 겨울마다 아이는 볼이 빨갛게 익었다. 쌀은 자주 떨어졌다.

    “혼자 쉴 만한 곳이 없었어요. 사택이 교회 안에 있다보니 사람이 수시로 들락거렸어요. 교회에서 먹고 자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초기엔 교회 건물 월세를 마련하려고 일주일에 두세 번씩 피아노 레슨을 했는데 저녁에 돌아오면 일거리가 산적해 있었어요. 일부러 늦게 오려고 천천히 걷기도 했죠.”

    한없이 아껴줄 것 같던 남편은 ‘교회 우선’으로 변했다. 그 서운함은 친정에도 말할 수 없었다. 이씨는 새벽기도회 때 퍼질러 앉아 엉엉 울었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땐 자다 깨면 울고 있었다.

    “나를 와이프가 아니라 성도로 생각하라면서 남편한테 상담 좀 하자고 한 적도 있었어요. 성도 이야긴 잘 들어주니까. 목사님이 기도하라고만 몰아붙이면 사모는 어디 가서 설 데가 없어요. 사모도 여자라 마음 알아주길 원하거든요. 어떤 성도가 정말 힘들게 할 땐 그냥 같이 욕해주면 좋겠어요.”

    돌변한 남편

    지금은 목사인 남편이 전도사 시절 청혼하며 “이 길이 너무 힘들 텐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스물네 살의 여자는 “아무 것도 걱정 안 된다. 당신과 함께라면 다 감당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 여자, 인천 남동구 D교회 사모 박모(45)씨는 “너무 몰랐기 때문에 사모가 된 것 같다”고 했다.

    “남편은 ‘이 사람이랑 있으면 뭐든 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심어줬어요. 그런데 결혼하고 나니까 다 못하게 하는 거예요. 율동하는 것도 ‘사모가 하면 말 나온다’고 제재하고. 전 날개가 꺾인 거죠.”

    결혼하고 한 달간 박씨를 업고 새벽기도회에 갔던 남편은 개척하자마자 등을 돌리다시피 했다. 교인과 갈등하는 박씨에게 남편은 항상 “당신이 잘못했다고 해”라고 했다. 소풍 장소를 교인들과 답사할 땐 박씨만 두고 갔다. 교인이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고, 차를 몰다 교인을 만나면 태웠다. 박씨는 혼자 아이를 업고 걸어 다녔다. 두 아들의 일기엔 언제나 세 명만 등장했다. 없는 건 아빠였다.

    “결혼 전엔 자상하게만 보였어요. 같이 살면서 모난 부분도 드러나더라고요. 갑자기 화를 내는데 ‘아차, 속았나’ 싶었죠. 그래도 교회에선 항상 웃어서 교인들은 저희 사이가 괜찮은 줄 알았어요.”

    교인들의 구박

    인천 강화군 E교회 사모 배모(40)씨는 신학교 동아리 선배와 결혼했다. 전공이 배씨는 성악, 선배는 신학이었다. 가족은 매우 걱정했다. 먼저 목사와 결혼한 배씨의 언니가 힘겹게 살고 있었다.

    “생활이 힘들기도 하지만 친구할 사람이 없잖습니까. 제가 어릴 때 어른들이 사모님 흉보는 걸 많이 들었어요. 어려도 귀는 있잖아요. 엄마가 반대한 이유도 ‘사모는 뭘 해도 욕 먹는다’는 거였어요.”

    우려는 금세 현실이 됐다. 전공을 살려 예배 때 성가대를 지휘했더니 “사모가 어디 나서느냐”는 아우성이 빗발쳤다. 학생들이 반바지 차림에 맨발로 교회에 오면 “어떻게 가르쳤기에 애들이 이러느냐”며 배씨를 힐책했다. 배씨가 주일학교 교사를 하거나 성경공부 모임을 운영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는 교인도 있었다. 한 중직은 교회에서 배씨가 만든 반찬이 입에 안 맞는다며 밥상을 물렸다.

    “시집살이 엄청 했죠. ‘왕따’(집단 따돌림)시키는 거죠. 하는 것마다 마음에 안 든다고 하시는데 그럼 나가라는 얘기잖아요. 어떤 분은 저 때문에 교회 못 나오겠다고 하셨어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나 싶었죠. 무조건 제가 잘못했다고 했습니다. 참 속상해서 비를 옴팡 맞고 길바닥을 걸어 다녔어요. 결혼하고 ‘잡은 물고기한테 떡밥 바치는 것 봤느냐’던 남편이 그땐 제 편을 많이 들어줬어요.”

    행복한 사모

    서럽게 울어보지 않은 사모는 없었다. 이들은 남편 목사와 교인을 이해하고 교회와 가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재설정하며 울음을 그쳤다. 남편 목사의 지지가 큰 힘이 됐다고 사모들은 말했다.

    “교인들에게 가정 문제가 많아서 상담 공부를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나이 50에 이렇게 호사를 부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제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한 사람은 벙어리 사모로 살던 A교회 서씨였다.

    “사모들이 그 많은 재능을 다 묻어두고 사세요. 저는 그런 부분을 남편이 좀 도와줘요. 자상한 건 결코 아니고요. 여전히 교회 중심으로 일하지만 희생만 요구하는 게 아니라 제 역할은 인정해줘요.”

    방황하던 B교회 목사는 아내 김씨를 동역자로 일으켰다. 김씨는 “함께 일하며 서로 굉장히 힘이 됐고 각자 문제를 극복하게 됐다”고 말했다. C교회 이씨도 남편 목사가 방향을 잡아준 경우다. 음악이나 신학을 공부하려던 그에게 남편은 ‘교인에게 어머니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며 상담학을 권했다. 시댁 식구 같은 교인들에 시달리던 E교회 배씨와 남편은 목회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사이가 됐다.

    D교회 목사는 아내 박씨의 고통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3년 전 박씨의 암 투병이 계기였다. “충격이었나 봐요. 자긴 한 번도 홀아비가 될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대요. 지금은 ‘교회는 버려도 가정은 못 버린다’고 해요.” 박씨의 남편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결혼은 목회하려고 하면 안 되고 사랑해서 해야 해. 불타던 사명감이 사그라졌을 때도 사랑하면 끝까지 같이 갈 수 있으니까.”

    전문가 조언

    부부상담전문가인 김향숙 하이패밀리 원장은 “10∼20년 전에는 사모의 행복 여부는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다”며 “이번 설문 결과는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했다. 과거엔 사모가 속박을 당연시했지만 지금은 배울 만큼 배우고 자아실현 욕구도 강해져 이를 해소하지 못하면 답답해한다는 뜻이다.

    “사모가 교회에서 (역할이) 허락 안 되면 뛰쳐나가는데 교회로선 굉장한 인력 낭비예요. 어떤 목사는 아내를 ‘밥순이 사모’라고 놀렸대요. 심방 따라다니면서 밥만 먹는다고. 사모들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건 제자훈련과 가정사역이에요. 목회자들이 공부하지 않은 가정사역은 사모에게 틈새시장이죠.”

    김 원장은 사모가 교인 입맛을 다 맞출 순 없다고 했다. “저랑 친한 한 사모는 모처럼 머리를 했더니 교인들이 ‘사모님 머리가 그게 뭐냐’고 하더래요. 그래서 다시 파마를 했더니 또 ‘그게 뭐냐’고 했답니다. 그래서 그 사모가 머리를 빡빡 밀었어요. 교인 불평이나 지적에 일일이 대응하면 안 돼요. 사모들이 그 요구를 다 채우려고 발버둥치다 자신을 잃고 우울증 같은 심리적 문제를 겪는 거예요.”

    “목사는 사모한테 사역(봉사)해야 한다”고 김 원장은 강조했다. “시골에서 교인들이 송아지가 아프다고 전화하면 자다가도 심방 가면서 사모가 밤새 끙끙 앓으면 거들떠도 안 봐요. 사모끼린 ‘우리가 새신자반에 등록하면 남편 목사님이 심방오실 것’이라고 농담해요. 이해는 돼요. 교회 성장에 대한 압박감이 크니까요. 하지만 목회에 성공해도 사모가 다 죽어간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김 원장은 “사모가 바라는 건 큰 게 아니다”면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내 편’만 돼 달라는 것”이라고 했다. “사모가 외식하자고 하면 목사는 ‘지난번 당회 할 때 맛있게 먹지 않았느냐’고 해요. 사모는 맛있는 거 먹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세미나를 가도 평신도가 한 명이라도 같이 있으면 불편해요. 1년에 한두 번, 단 몇 시간만이라도 교회 일에서 분리된 시간을 갖는다면 그 풍족함이 나머지 삶의 분주함을 보완해줄 수 있어요. 시간의 양이 아니라 질을 말하는 겁니다.”

    글=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