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교육및 상담/교육및 진로 상담

다언어 구사의 비밀(언어의 천재들): 영어는 기본, 몰입교육 찬성? 바벨 탑의 저주를 축복으로!

맘사라 2013. 11. 23. 11:08

영어는 기본, 몰입교육 찬성? 바벨 탑의 저주를 축복으로!

[다언어 구사의 비밀] 마이클 에라드의 <언어의 천재들>

박현주 번역가  기사입력 2013-11-22 오후 6:25:13

 <창세기> 은유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불통 이전의 세계, 바빌론의 탑이 아직 있는 세계를 상상해 보자. 가령, 테드 창의 단편 '바빌론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김상훈 옮김, 행복한책읽기 펴냄) 수록)에서처럼 하늘 끝까지 닿은 꼭대기에서 천국의 궁륭을 뚫는 광부의 소임을 맡았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소설에서 바벨탑은 "시나르의 평원에 눕혀 놓고 한쪽 끄트머리에서 다른 끄트머리까지 걸어간다면" 이틀이면 다다를 거리지만, 없이 올라가면 , 수레를 끌고 올라가는 자들과 함께 올라간다면 달은 걸릴 만한 높은 탑이다. 천국에 이르기 위해 올라가는 일꾼은 안에서 엘람 인도, 이집트 인도 만나지만, 누구와도 어렵지 않게 이야기할 있을 것이다. 모두 하나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인간은 신의 영역을 탐하지 않고, 신은 인간이 오만하다는 죄로 서로 통하지 않는 벌을 주지 않은 시대의 우화이다.

11
12 화요일, MBC <PD 수첩> '조기 영어 교육 돌풍, 신음하는 아이들' 편을 보면서 바벨의 벌을 떠올렸다. 정부가 2014년부터 사립 초등학교의 영어 몰입 교육을 금지한다고 공표하자, 그간 시스템 하에서 "미국 아이들과 다름없는 교육" 이점을 기대한 학부모들의 항의가 쏟아졌다는 화두로 시작한 프로그램은 모두에게 익숙한 조기 교육의 문제점을 그다지 새로운 발견 없이 반복하였다.

<언어의 천재들>(마이클 에라드 지음, 박중서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각기 다른 언어가 신이 내린 저주라면 이를 극복하려는 언어를 배우겠다는 열의는 저주를 푸는 비법이어야 텐데,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도리어 고통이 된다는 역설은 이제 낯설지 않다. 외국어 구사 능력이 계급 사회의 사다리를 가장 빨리 올라갈 있는 마법의 주문이면서도 되레 구분 짓기의 가장 강력한 도구로서 계급으로 향하는 문을 지키는 문지기 역할을 하는 한국 사회에서 고통받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드물다.

각종 어학 능력을 증명하기를 요구 받은 이들, 혹은 아이들만은 내가 겪은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 영어 몰입 교육을 하는 유치원이나 사립 초등학교에라도 보내고 싶은 학부모들에게 <언어의 천재들 : 세계에서 가장 비범한 언어학습자를 찾아서> (마이클 에라드 지음, 박중서 옮김, 민음사 펴냄, 이하 <언어의 천재들> 표기) 일견 무척 매력적인 책일 것이다. 가지 언어도 아니고 수십 개의 언어를 구사할 있는 초다언어구사자들(hyperpolyglot) 대한 책이라니, 여기에는 로제타 스톤과 해커스 토익과 윤선생 영어교실도 알려주지 않은 언어 학습의 비전(秘傳) 숨어 있을 같지 않은가?

영문학 박사인 저자는 드넓은 영어 교육 시장 덕택에 세계 각지에서 영어 교육자로 일하다 아마 우리의 사립 초등학교 엄마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이들을 만났던 모양이다. 저자에게 영감을 것은 사람들이 품은 열망이었고, 그는 세계 곳곳에서 고통 받는 언어 학습자들의 바람을 안고 통시적으로, 혹은 공시적으로 가장 뛰어난 언어 학습자를 찾아 순례를 떠난다.

1838년에 그려진 메조판티 추기경의 초상화. (출처 Wikimedia Commons)

저자가 처음 향한 곳은 이탈리아의 볼로냐, 전설의 다언어구사자 메조판티 추기경의 기록이 보관된 아카이브가 있는 도서관이 있는 도시이다. 메조판티는 72가지, 혹은 114가지 언어를 구사했다는 19세기 인물이다. 전설적 인물의 능력에 대한 증거로 이런 신화적 일화가 있다. 메조판티의 임무 중에서는 '콘페소레 데이 포레스티에리 (Confessore dei forestieri)' 불리는 외국인 전용 고해신부 역할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다음날 처형될 외국인 사형수들의 고해 성사를 듣고 죄를 사하여 주는 임무를 맡았다. 외국인 사형수들의 언어를 다른 이들은 몰랐기 때문에 오직 메조판티만이 성스러운 소임을 다할 수가 있었다. 그는 사형 전날 감옥에 다녀와서 사형수를 만나고, 하룻밤 공부한 죄수들이 처형되기 직전에 그들의 언어로 죄를 사해줄 있는 놀라운 능력을 보였다. (71)

하지만 <언어의 천재들> 한국의 열정적인 어머니들은 약간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한국어의 제목은 분명히 어떤 상업적 잠재 독자를 염두에 듯하지만, 책의 원제는 "Babel No More" 뿐이다. , 바벨의 저주를 풀어내는 뜻을 두고 남달리 강한 의지와 축복받은 재능으로 노력한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연구서이다. 더욱 실망스럽게도 책에는 우리가 모델로 삼을 만한 학습자가 많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어떤 이는 전설이고, 어떤 이는 거짓말쟁이였으며 대부분은 자신의 언어 능력을 증명하지 못했다. 오히려 책의 대부분은 다중언어구사능력(multilingualism)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할애하고 있다.

<
언어의 천재들>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역시 "다언어구사자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이다. 혹은 "언어를 안다" 무슨 뜻인가? 사람이 가지 언어를 구사한다고 , 그의 어떤 능력을 뜻하는 것인가? 여기에 명확하고 솔직한 대답은 무척 만나기 어렵다.

지난 동안 나는 학기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언어 습득이나 이중 언어 관련 수업을 했고, 매번 번째나 번째 시간에 "자신을 이중언어구사자(bilingual)라고 생각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내가 상대하는 학생들은 대부분이 언어 관련 전공이고, 상당히 뛰어난 어학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다. 중에는 외국에서 태어나거나 어릴 살다 경우도 적지 않은데, 다른 사람 앞에서 "나는 다언어구사자"라고 말하기를 꺼리기도 한다. 다중언어구사능력에 대한 한국 사회의 상반된 가치와 태도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이렇게 다언어구사자로 자처하기를 주저하는 일반의 인식에는 2, 3 언어 또한 모국어와 같은 수준으로 구사할 있는 사람이라는 그림이 깔려있다. 이런 입장은 은유로 그려보자면 이러하다. 사람의 정신은 고요한 도서관과 같고 거기에는 언어 능력에 할애된 서가가 있다. 여기에 1언어라는 책을 꽂았다고 하자. 그러면 완벽한 다언어구사자는 거기에 먼저 꽂힌 책과 비슷한 두께와 크기의 2, 3 언어가 꽂혀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 것이다. 많은 이들은 "영어를 줄은 알지만, 한국어와 비슷하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자신은 다언어구사자라고 없다고 말한다.

책의 저자인 마이클 에라드 또한 다언어구사자를 정의하는 기준을 심도 있게 논의한다. 에라드는 언어학자 비비안 쿡이 제시한 개념인 다중 언어 자질(multicompetence) 탐구하는데, 이는 개의 단일 언어 능력이 산술적으로 결합된 시스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지 이상의 언어를 갖는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하나의 도구를 얻는 아니라, 달리 조직되고 언어가 융합된 인식 체계가 정신 구조 안에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1언어와 다른 언어가 어떤 모듈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러 연구가 진행 중이지만, 저자는 다언어구사자에게 각각의 언어에서 원어민 수준의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이론적 입장에 동의하고 있다.

언어를 배우면 기존의 언어에 하나의 체계로 부착되어 새로 얻은 능력은 기존의 언어 능력과 걸맞은 수준으로 균형을 이루어야 진정한 다언어구사자이고, 이것이 언어 학습의 궁극적 목표라는 생각은 조기 교육을 지지하는 쪽뿐만 아니라 과열된 외국어 교육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도 흔히 있다. 위에 예로 TV 프로그램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외국어 교육을 일찍 시작한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를 비교하는 실험을 통해 조기 영어 학습자가 창의력이나 일반 인지 능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은 흔하다.

하지만 이중 언어 학습자와 단일 언어 학습자의 인지 능력이 같은 경로로 발달하지 않거나 다른 양상을 띤다는 단순한 사실만 인정하면, 같은 실험으로 집단을 비교하는 연구의 허점 또한 보인다. 결국에는 달리 시작한 아이들의 도착점이 어디인가를 물을 수도 있고, 아이의 인지 방식이 다르다면 평가지의 타당도를 질문할 수도 있다. 다언어구사자에 대한 연구는 계속 진행 중인 만큼, 상반되는 실험 결과도 있고 명확한 답변도 내릴 수는 없지만, 우리가 <언어의 천재들>에서, 또한 자기의 경험에서 있는 것은 하나 있다. 다언어구사자는 다른 부족이라는 것이다.

책에서 흥미로운 점은 저자의 양가적 태도에 있기도 하다. 그는 현재 21세기 이중 언어 습득론이 지지하는 기능적 다언어구사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진정한 다언어능력, "원어민에 가까운 2언어 능력의 습득 가능성"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보인다. , 단순히 단어를 알거나 문장을 파편적으로 구사하는 능력 이외에 일정 수준 이상의 언어 능숙도를 갖춰야 진정한 다언어구사자로 인정하겠다는 순수주의적 태도도 숨어 있다.

하지만 저자는 적어도 원어민처럼 말하기 위해 생각마저 바꾸라고 무신경하게 말하는 영어 교재 개발자들과는 달리 무척 성실한 연구자이다. 그는 다언어능력을 탐구하기 위해 언어 습득과 학습 전략 이론, 신경의 가소성과 두뇌 활성화에 대한 신경 언어적 발견, 사회언어학적 관점의 이중 언어 공동체의 갈등에 이르기까지 각종 분야의 연구를 정리하는 동시에, 지금 동시대에 존재하는 다언어구사자 사례를 찾아 나서며 이론을 시험했다. 결과적으로 저자는 단호한 답을 내지는 않았지만, 자체는 언어 습득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알아야 기본적인 논의들이 꼼꼼하게 언급된 개론서의 역할을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

그래도 역시 나는 "영어 하나만으로도 행복하게 있을 알았다" 말한 저자가 다언어구사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세계의 지배적 언어, 세계 공용어를 모국어로 삼는 화자의 순진한 낭만성이 깃들어있다는 생각을 쉽게 지울 수가 없다. 오래전 미국에서 한국인 조교가 진행하는 언어학 수업을 들었을 , 그는 미국인 학생들을 앞에 앉혀 두고 불공정할지도 모르는 농담을 했다.

"
가지 언어를 하는 사람을 뭐라고 하죠? 이언어구사자(bilingual)라고 하죠. 가지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뭐라고 할까요? , 삼언어구사자(trilingual)라고 해요. 그럼 가지 언어만 말하는 사람은 뭐라고 하나요?"

학생들이 단언어구사자(monolingual)라는 대답을 우물거릴 즈음, 그는 미리 양해를 구하고 대답했다. "미국인(American)이라고 한다지요." 모국어 억양이 남은 영어로 말하는 외국인 선생님 앞에서 미국인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어떤 생각을 했는지, 역시 외국인 학생일 뿐인 나는 수가 없었다. 물론 이민자들이 건설한 미국이야말로 진정한 다언어구사자들의 나라이지만, 타고난 모국어 외에 다른 언어를 배울 필요성이 교양이나 학술적인 동기 외에는 크지 않으며 언어 학습이 선택이 있는 사람들의 나라라는 것을 아마 학생들 또한 이해하지 않았을까 막연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피터르 브뤼헐 1세의 1563 <바벨탑>. (출처 Wikimedia Commons)


다언어구사자들이 똑같은 대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에서 자라고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가지 언어만 가지고도 행복하게 있다고 선뜻 말하기 어렵다. 영어 능력을 가진 다언어구사자는 존경받지만, 결혼 이민자인 어머니의 모국어를 가진 다언어구사자는 한국어만을 능숙하게 말하는 화자로 전환하는 것이 유리한 사회가 아닌가. 어떤 정도의 능숙도에 도달했든 면접장이나 <스타킹> 같은 재능 자랑 밖에서는 "다언어구사자" 자처하기 꺼려진다.

책에 등장하는 언어의 천재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넘어서 바깥에 위치하고 학습에 대한 순수한 열망을 지닌 이들이다. 작가는 "우리는 경직된 두뇌를 갖고 살기로 체념한다. 우리는 언어적 내부자로 남아서도, 우리가 속해 있다고 느끼는 곳에 안전하게 머물면서도 여전히 행복하다" 말했지만(420), 아침 6시와 저녁 8시에 영어 학원으로 향하는 우리는 정말로 행복할까? 어쩌면 행복감의 차이가 다른 언어 공동체에 속한 화자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불통, 진정한 바벨일지도 모른다. 탑을 올라갈 때는 같은 언어로 이야기해도 내려올 때는 다른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불통은 언어의 문제만은 아니다. 같은 말을 하는 사람끼리도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는 얼마나 많은가. 아내의 말에 기울이지 않는 남편, 자식의 호소를 알아들을 없는 부모, 다른 곳을 가리키는 연인, 같은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어도 서로 증오하는 사람들. 이런 삶의 단절을 의미하는 불통에 비하면 오히려 언어적 불통은 불행하지는 않다.

언어를 공부했으며, 언어를 도구로 일을 하는 나는 바벨이 저주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모든 사람에게 자기를 표현하는 언어가 있다는 사실은 아름답다. 결국, 불통은 언어의 차이가 자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다른 언어가 있기에 우리가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를 발휘할 있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의 천재들> 등장하는 초다언어구사자들은 학습법을 알려주는 우등생이나 인간 두뇌의 신비를 간직한 천재라기보다는 불통의 세계에서도 타인을 이해하고 싶다는 열망을 보여주는 사례들로서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

첫머리에 언급한 단편 <바빌론의 >에서는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세계 창조의 비밀을 이해한 광부 힐라룸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서 다시 바빌론으로 돌아간다. 그가 다시 찾아간 바빌론은 이제 이전처럼 가지 언어로 말하는 도시였을까?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힐라룸은 개의하지 않았으리라고 나는 언제나 상상했다. 진정으로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에, 나누고 싶은 비밀이 있었기에 그들은 새롭게 부여받은 언어의 능력으로 간극을 뛰어넘었으리라. 각자의 언어를 말하는 우리는 서로에게 닿고 싶어서 다른 언어를 배울 있다. 인간은 자기 언어를 갖고, 다른 언어를 익히는 능력을 그렇게 얻어낸 것이었다. 하늘의 천장에 닿은 노력으로, 신에게 도전한 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