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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자녀 교육:왜 기독교 교육에 유대인의 자녀교육이 필요한가?

맘사라 2014. 11. 16. 02:15

왜 기독교 교육에 유대인의 자녀교육이 필요한가? (기독교교육학적 입장에서)

 

- 요약본 - 

현용수 교수(쉐마교육연구원 원장)

I. 문제 제기

II. 왜 기독교교육에 유대인 자녀교육이 필요한가?

1. 신약 성도들도 영적 유대인이다
2. 신약과 구약의 중심주제: 신약은 복음, 구약은 선민교육(쉐마)
3. 유대인의 쉐마 교육은 부모가 자녀를 말씀의 제자 삼는 교육
4. 유대교와 기독교의 구원과 성화는 어떻게 다른가?
5. 율법의 두 가지 기능: 율법의 구원론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
6. 일부 오해들에 대한 답변

III. 결론

 

I. 문제 제기

필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방인이 들어가기 힘든 정통파 유대인 커뮤니티에서 성경적 유대인 자녀교육을 구체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저서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이다(부제: 유대인 자녀교육, 전3권)”을 집필하였다. 이 책이 약 12만권 이상이 팔리면서 한국 교계는 성경적 유대인 자녀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가정교육과 기독교교육의 개혁이 시작되었다. 그런데도 일부에서는 “왜 복음도 없는 유대인 자녀교육이 기독교교육에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책 원제: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 2천년 동안 기독교와 유대인과의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질문이다.

필자가 유대인 자녀교육을 연구한 동기는 “기독교는 어찌하여 지난 2천년 동안 계대교육에 실패하였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신약교회의 태동은 예루살렘의 오순절 다락방 성령강림에서 시작된 후 기독교 2천년 동안 계속 다른 민족에게 복음은 전하고 자기 민족교회는 죽어왔다. 현재 한국 교회도 2세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90%이상이 교회에 안 나간다. 교회교육과 가정 교육이 90%이상 실패했다는 증거다. 그런데 유대인은 어떻게 아브라함부터 현재까지 4천 2백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하는데 성공했는가? 필자는 그 비밀을 유대인의 쉐마(선민교육)에서 찾았다. 따라서 필자는 왜 기독교교육에 유대인의 선민교육이 필요한지를 논증하여 그 당위성을 밝히고, 이를 널리 알리어 한국민족 교회의 후대교육을 살려 주님 오실 때까지 살아남아 세계 속의 제사장 민족이 되기를 소원한다.

 

II.  왜 기독교 교육에 유대인의 자녀교육이 필요한가?

 

1. 신약 성도들도 영적 유대인이다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인 유대인만 유대인이 아니라 신약 성도들도 영적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가 의인이 된 것처럼 누구든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의인이 되어 아브라함의 아들들이 되기 때문이다(갈 3:6∼9).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성도의 ‘아버지’다(롬 4:11).

따라서 신약의 기독교인들이 장차 천국에 가면 구약에 나타난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물론 모세나 다윗, 그리고 이사야나 예레미아 같은 선지자들도 만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이나 바울도 유대인이셨다. 따라서 그들이 받아왔던 선민 교육은 현재 기독교인들도 받아야 한다.

2. 신약과 구약의 중심주제: 신약은 복음, 구약은 쉐마(선민교육)

왜 기독교인은 유대인의 자녀 교육을 배척해 왔는가? 그것은 신약과 구약의 중심 주제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약의 중심 주제가 구원에 이르는 복음이라면, 구약(토라)의 중심 주제는 첫째, 메시아닉 사상이고 다음은 선민교육인 쉐마다. 
먼저 신약의 중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로 요약된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십자가의 도(고전 1:18)이다. 이를 온 인류의 구원에 관한 기쁜 소식 즉, ‘복음(Gospel=Good News)’이라고 말한다(Bryant, 1967, p. 203). 

그러나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 구원받은 이후 갓 태어난 하나님의 백성(a baby Christian)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성숙한 선민(기독교인)이 되느냐의 선민교육의 내용과 방법은 주로 구약의 선민교육에 있다. 특히 가정에서 자녀를 하나님의 거룩한 선민으로 양육하는 성경적 원리와 방법은 구약 성경에 근거한다. 물론 신약에도 부분적으로 있지만 원론적으로는 구약에 있다. 따라서 신약의 중심 주제인 ‘복음’이 구원의 열쇠라면 구약의 중심 주제인 ‘선민교육, 쉐마’는 자녀교육의 열쇠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관계는 신약과 구약이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처럼 신약의 복음과 구약의 쉐마가 서로 뗄 수 없는 보완 관계이다.

따라서 기독교교육학적인 입장에서 신약의 ‘키 워드(Key Word)’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한다면, 구약의 ‘키 워드’는 유대인의 선민교육인 ‘쉐마’이다(참조: 구원론적인 입장에서 구약의 키 워드는 ‘메시아닉 사상’이다. 기독교교육학적인 입장과 구원론적인 입장이 다르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전도에는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 빠질 수 없지만 구원받은 이후의 선민교육에는 신약의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 자주 언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성도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데 필요한 성화의 도구로 구약의 율법을 자주 인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의 삶에 필요한 기독교교육은 실천신학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복음과 선민교육은 구별되어야 한다. 따라서 “유대인 자녀교육의 원리와 방법들은 기존 기독교교육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성경의 유일한 대안이다”(고용수, 현용수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 서문, 2002년).

3. 유대인의 쉐마 교육은 부모가 자녀를 말씀의 제자 삼는 교육

유대인의 쉐마 교육은 가정에서 부모가 혈통적 자녀에게 율법(말씀)을 전수시켜 자녀를 ‘말씀 맡은자’(롬 3:2)로 키워 자녀를 영적 제자로 삼는 선민교육이다. 따라서 유대인의 성년식인 ‘Bar Mitzva'는 ‘율법의 아들(말씀 맡은 자)’이란 뜻이다. 선조로부터 율법을 전수받은 부모는 다음 세대인 자녀들에게 말씀을 전수시키기 위해서는 성경에 근거한 다음의 주제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몸소 가정에서 실천해야 한다.
- 왜 가정은 성전인가?
- 성경적인 자녀의 개념은 무엇인가?
- 쉐마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왜 여호와의 토라(율법, 말씀)를 그토록 강조하시는가?
- 왜 아버지는 가정의 제사장인가?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아버지의 의무는 무엇인가?
- 왜 어머니는 남편을 돕는 배필인가? 무엇을 도와야 하는가?
- 왜 자녀를 말씀의 제자로 삼는데 효도교육이 중요한가?
- 왜 고난의 역사 교육이 중요한가? 왜 하나님은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난의 광야
   길을 걷게 하셨는가?

위의 주제들은 모두 원론적으로 구약 성경에 근거한다. 유대인의 자녀 교육은 자자손손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하여 영적 자녀로 키우는 구속사적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유대인이 자자손손 토라를 전수하여 현재 우리가 구약 성경을 갖고 있지 않는가? 만약 그들이 말씀을 전수하지 못했다면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중단되었을 것이다. 

신약 시대의 기독교인도 말씀으로 거듭난 ‘말씀 맡은 자(롬 3:2)’다. 따라서 우리는 구속사적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해 준 유대인의 수고에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세대차이 없이 말씀을 전수한 비밀을 연구하여 우리 자녀 교육에 적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성경적 유대인 자녀교육은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의 새로운 패라다임이다.”[김의환, 현용수의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이다(부제: 유대인 자녀교육)’ 서문, 1999년].

4. 유대교와 기독교의 구원과 성화는 어떻게 다른가?

하나님의 선민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에게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다(롬 9:15-18, 10:6-7). 구약의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혈통적 유대인임을 강조한다. 물론 유대인도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창 15:6). 그들은 오실 메시아(예수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이다.

따라서 그들은 출생 때부터 교육의 내용으로 구원에 대한 교리보다는 하나님의 선민으로 어떻게 이방인과 구별되게 살아가느냐 즉,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닮아가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율법이 중요하다. 그들은 그들의 613개의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의 영적 순결과 도덕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모세의 율법책을 ‘성경’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신약 시대 기독교인은 하나님에게 선택되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백성이다. 하나님은 신약 시대에 ‘예수’라는 이름 이외에 다른 구원받을 만한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행 4:12). 따라서 기독교인은 누구든지 출생하여 이방인으로 살다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선민이 된다. 구원론적 입장에서 예수님은 복음의 핵심이다. 기독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 없이 먼저 개인 구원을 강조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구원론에 의하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은 유대교에 속한 유대인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보아야 옳다.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이 되셨기 때문이다(롬 10:4). 따라서 유대인은 구원을 위한 복음(예수님)이 필요하고, 구원받은 기독교인은 유대인의 선민교육인 쉐마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한 동반자여야 한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구원과 성화의 차이점

 

* 구약의 유대인: 출생하면서부터 하나님의 선민





* 신약의 기독교인: 기독교인의 가정이라 하여도 예수님을 믿어야 하나님의 선민

 

기독교 가정의 기독교교육의 우선 수위는 무엇인가? 첫째, 복음을 자녀에게 증거하여 구원에 이르게 해야 하고, 그 후 유대인의 선민교육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의 선민교육 자체만으로는 훌륭한 성경적 교육이 될지 모르지만 영혼의 구원에는 이를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신약시대에는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나 구원과 선민교육이라는 두 개의 열쇠가 필요하다. 즉, 첫째는 구원을 위한 복음(예수님)이란 열쇠이고, 둘째는 자녀교육을 위한 유대인의 선민교육(쉐마)이란 열쇠다.

기존 기독교인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 소위 모태 신앙 신자들이 구원의 확신이 약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 즉, 복음은 전하지 않고 성경 교육(선민교육)만 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목사의 가정이라도 자녀들에게 먼저 구원을 위한 예수님(복음)을 전한 후 신구약 성경을 기본으로 한 선민교육을 해야 한다. 아울러 기억할 것은 예수님(복음)을 믿기 위해서는 성령 체험이 필수적이다. 성령의 능력 없이는 구원의 확신이 있을 수 없다. 때때로 교회에서 미온적인 모태 신앙 신자라 하더라도 성장 후에 성령의 체험으로 예수님을 만난 후 크게 변하여 하나님께 헌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대인은 신약의 복음 없이 구약의 선민교육만으로도 세계에서 으뜸가는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는데, 우리가 신약의 복음에 유대인의 선민교육을 더하면 성령의 능력으로 유대인보다 더 나은 교육을 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5. 율법의 두 가지 기능: 율법의 구원론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

유대인 교육을 반대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유대인의 율법을 거론한다. 신약 시대에 예수님이나 바울이 배척했던 것은 율법을 남용하는 율법주의이지 율법이 아니다. 율법주의는 악하나 율법은 선하고 신령하다(롬 7: 12, 14). 하나님의 백성은 율법이 필요하다. 왜 필요한가? 율법에는 크게 두 가지 기능이 있다. 첫째는 복음을 받아드리는 데 필요한 율법의 구원론적 기능이고, 둘째는 율법의 교육적 기능이다. 

첫째, 복음을 받아드리는 데 필요한 율법의 구원론적 기능은 인간에게 율법이 있으므로 죄를 깨달아 죄인임을 시인하고, 이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예수님의 보혈의 귀중함을 알아 그를 구주로 영접하게 하는 기능이다(롬 3:20, 5:20, 7:7; 딤전 1:9). 

둘째, 율법의 교육적 기능은 구원받은 이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에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필요하다(레 19-1-2; 신 28: 1-6: 롬 8:4; 엡 4:15). 
율법의 두 가지 기능에서 구약의 유대인과 신약의 기독교인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유대인은 구약에서 율법의 교육적 기능을 강조했고, 신약에서는 율법의 구원론적 기능을 강조하였다. 왜 그런가? 구약의 유대인은 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선민이 되기 때문에 그때부터 율법에 의한 선민교육이 필요하고, 신약에서는 율법에 의한 선민교육 이전에 모든 백성,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의 선민이 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에서는 먼저 율법의 구원론적 기능을 강조하여 구원을 받게 하고, 그 이후에는 구약에서 유대인이 강조했던 율법의 교육적 기능을 강조하고 가르쳐 지켜 행하여야 한다. 즉, 율법의 두 가지 기능, 율법의 구원론적 기능이 먼저이고, 그 다음 율법의 교육적 기능을 강조하여야 한다. 이것이 율법의 두 가지 기능, 율법의 구원론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의 조화이기도 하며 신구약의 조화이기도 하다.

그동안 전통적 기독교의 입장의 가르침은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으로서의 역할만을 강조하어 왔다(갈 3:24).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부터 율법에서부터 해방되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은 받았으나, 말씀(율법)을 따라 구별된 백성이 되는 데는 미흡했다. 율법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별된(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는가? 율법 없이 어떻게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가? 이는 율법의 교육적 기능을 전혀 깨닫지 못한 무지의 소치이다. 바울은 어떻게 말하였나? 바울도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라고 말했다. 

예수님도 유대인의 율법교육을 받아 지켜 행하라고 말씀하셨다(마 23:1-3). “무엇이든지 저희(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말하는 바(율법)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왜 그런가? “저희는 (율법을) 말만 하고 (율법대로) 행치 아니하는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말과 행위가 다르다는 말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무엇이든지 유대인(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말하는 바(율법)는 행하고 지켜야 한다(마 23:2). 왜 그런가? 구약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적용되는가? 물론 적용된다. 만약 오늘날도 바리새인적 목사들이 강단에서 설교는 성경대로 잘 전하지만 행위가 위선적이라면,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저희(목사들)의 말하는 바(율법)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당부하실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는 율법(말씀)을 지켜야지 안 지키거나 율법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

구약 신학적 입장에서 기독교인은 왜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 속에 구체적인 율법을 기록하여 보존하게 하셨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단순히 구원을 얻고 거기에만 머무르도록 하고자 함이 아니고, 더 나아가 그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답게 온전케 되어야 하며 또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딤후 3:17). 그렇다면 왜 이방의 기독교인도 유대인의 율법을 지켜야 하나?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의 빛(사 49:6)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의 빛으로서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율법 역시 이방에 비쳐져야 하며, 이방인 역시 그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도리를 배워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김철원, 현용수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 서평, 2002년 11월 30일). 

유대인의 ‘쉐마’ 교육은 율법의 교육적 기능을 가장 완벽하게 활용하는 성경적 인성교육의 내용과 방법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을 향하여 구별된 백성이다. 유대인은 세속과 구별되게 살기 위하여 “하라”는 명령 율법 248개와 “하지 말라”는 금지 율법 365개, 도합 613개의 율법을 지켜 행한다. 따라서 영적 유대인인 기독교인도 하나님의 선민으로 율법을 기독교교육의 기능으로 마땅히 지켜 행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율법은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성화의 도구이다. 그리고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축복은 행함으로 받는다. 

그렇다면 현대를 사는 정통파 유대인이 율법을 행하는 것과 신약의 성도들이 율법을 행하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현대 정통파 유대인이 율법을 행함은 복음을 거절했기 때문에 구원 없이 행하는 선민교육이고, 신약 성도들이 율법을 행함은 복음을 받아들인 후 구원 받아 성령을 좇아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가는 성화의 과정이다(롬 8:4). 그런 면에서 필자의 유대인 자녀교육은 구원론적 입장에서는 보수 개혁주의 내지 칼빈주의 입장을 취했지만, 기독교교육의 성화교육 입장에서는 웨슬레안 입장의 기독자 완전론과 연관 시켰다(이정근, 현용수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 서평, 2002년 11월 30일).

물론 구약의 율법을 모두 지킬 필요는 없다. 대체적으로 유대교 율법이 요구하는 특별한 날과 절기를 지키는 전통이나 제사법은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은 신약 시대의 성도는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신약의 성도들이 구약의 어느 율법은 지켜야 하고, 어느 율법은 지키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이 신약 성경에는 명확히 없다는 점이다. 샌더스는 이를 “바울이 신약의 성도에게 맞는 완전한 할라카 체제(유대인의 세세한 응용 규례)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아직도 논쟁점으로 남아 있다(Sanders, 1995, pp. 144-145).

6. 일부 오해들에 대한 답변

그동안 필자는 많은 질문들을 받아왔다. 이런 질문들은 기독교 2천년간 쌓여온 문제이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가 간다. 따라서 지면상 중요한 몇 가지만 답한다. 어떤 이는 “유대교는 구원이 없기 때문에 이단이다. 따라서 그들의 교육 내용이나 방법은 기독교에서 가르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단인 유대인이 사용하는 교육의 내용인 구약성경을 왜 기독교에서 글자하나 빼지 않고 사용하는가? 그리고 왜 유대인의 조상들인 아브라함이나 다윗, 다니엘, 에스라 및 느헤미아 등을 믿음의 조상으로 소개하고 그들의 교육(유대인 교육)과 사상(유대인 사상)에 대하여 설교하는가? 그들도 신약의 기독교인처럼 구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구약은 복음의 뿌리이다(유대인과 기독교인과의 자세한 관계는 로마서 11장 참조). 

어떤 이들은 “기독교인이 복음에 기초한 기독교교육을 시켜야지 왜 복음도 없는 유대인의 자녀교육을 시켜야하느냐?”고 질문한다. 복음에 기초한 기독교교육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선민이 된 후 하나님의 형상, 즉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는 교육을 말한다(하나님의 형상은 곧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고후 4:4; 골 1:15; 히 1:3). 하나님의 선민은 누구인가? 구약 시대에는 유대인이요, 신약 시대에는 복음(예수님)을 받아들인 기독교인이다. 따라서 신약의 기독교인이 신약의 중심주제인 복음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선민이 되었으면, 구약의 중심주제인 유대인의 선민교육(쉐마)을 받아들여 가정과 교회에서 가르쳐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을 받아들인 기독교인은 신약 성경은 물론 유대인이 저술하고 자자손손 보존해온 구약 성경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 때문이다. 만약 신약의 기독교인이 유대인은 복음이 없기 때문에 유대인의 선민교육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유대인의 성경인 구약성경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그럴 수는 없다. 따라서 신약의 기독교인들은 신약시대에 비록 복음을 거절하여 하나님의 선민에서 제외되어 있지만 구약 성경과 구약에 근거한 선민교육을 전해준 유대인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서 2천년간 구약의 선민교육을 소홀히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신약의 기독교가 너무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복음만 강조한 나머지 신약의 복음과 구약의 선민교육을 구별하지 못한 오해에 기인한다고 본다.

어떤 이는 “유대인의 성경은 구약뿐인데 그들의 교육이 신구약을 믿는 신약 성도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다. 물론 적용된다. 사도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히 4:12)라고 말씀한다. 당시 바울과 히브리 기자가 지칭한 ‘모든 성경’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 성경을 말하는가 아니면 신약 성경을 말하는가? 물론 그것은 구약 성경뿐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신약 성경이 편집되기 이전이기 때문이다(참조: AD. 약 300년 경에 신약 성경이 정경으로 인정됨). 따라서 초대교회는 물론 몇몇 사도들의 서신들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구약 성경만으로 신앙생활을 해왔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구약 성경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할 수 있다”는 뜻이다(딤후 3:16-17). 여기에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교육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구약의 토라 즉, 율법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초대교회에도 구원은 복음을 전하여 받게 하고 자녀교육은 구약의 율법, 즉 쉐마로 시켰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따라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은 구원의 열쇠인 복음과 더불어 자녀교육의 열쇠인 유대인의 쉐마교육을 회복시키자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III. 결론

 

지금까지 2천년간 기독교인들이 자녀교육에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구약의 쉐마교육을 유대인 것이라고 무시한 데 있었다. 따라서 신약교회는 구원의 열쇠인 복음은 강조하여 구원은 얻었지만, 자녀교육의 열쇠인 유대인의 쉐마교육을 배척했다. 그 결과 시대마다 어느 민족이든지 다른 민족은 선교하면서도 자자손손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유대인이 복음을 받아 드림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기독교인은 구약의 쉐마교육을 통해 부모들이 자녀들을 제자 삼을 수 있다. 복음은 신약의 중심주제이고 쉐마를 통한 말씀전수는 구약의 중심주제이다. 즉,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관계는 신약과 구약이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처럼 신약의 복음과 구약의 쉐마가 서로 뗄 수 없는 보완 관계이다. 왜 신약교회가 자자손손 말씀을 전수하는 데에는 실패했는가? 유대인처럼 랍비는 부모를 말씀의 제자삼고, 말씀을 받은 부모가 가정에서 자녀를 말씀의 제자 삼는 성경적 교육목회의 본질을 외면했기 때문이다(박희민, 현용수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 서평, 2002년 11월 30일). 

한국 교회의 90% 이상이 실패하는 2세 교육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 대안은 4200년간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충분히 검증된 성경적 유대인 자녀교육뿐이다. 특히 중국이나 일본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민족이지만 한국은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지 않으면 또 다시 중국이나 일본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1세 신앙의 유산을 자자손손 후세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더 늦기 전에 유대인의 쉐마교육을 도입해야 한다. 

실제로 성경적 유대인 자녀교육의 유익은 많은 목사님들이 필자의 저서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이다”를 읽고, 혹은 ‘쉐마목회자클리닉’을 마치고 교회에서 성경적 쉐마교육목회를 실천하여 건강한 가정, 건강한 교회가 회복되어가는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현용수 교수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아름다운세상, 2002) 참조바랍니다>

참고 서적

- Bryant, Alton. Editor. (1967). The New Compact Bible Diction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 Sanders, E. P. (1995). Paul, the Law, and the Jewish People. Translated by Jin-Young Kim, 
   Seoul: Christian Digest.

- 고용수, (2002). 바른신앙, 바른지식, 바른생활의 균형있는 성경적 자녀교육 지침서.
   현용수의 ‘부모여 자 녀를 제자 삼아라’ 서문.

- 김의환, (1999). 개혁주의 교육에 공헌할 것. 현용수의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이다
   (부제: 유대인 자녀교육)’ 서문.

- 김철원. (2002). 유대인의 율법도 이방에 비쳐져야 한다(구약 신학적 입장에서).
   현용수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 서평, 2002년 11월 30일.

- 박희민.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안고 있는 가장 핵심 문제를 찌른 발견(목회신학적 입장에서).
   현용수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 서평, 2002년 11월 30일.

- 성경(한글 개역). (1997). 서울: 대한성서공회.


- 이 정근. 기독교교육의 중요한 취약점을 보완했다(기독교교육학적 입장에서).
   현용수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 서평, 2002년 11월 30일.

- 현용수. (1999).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이다(부제: 유대인 자녀교육, 전3권). 서울: 조선일보.

- 현용수. (2002).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부제: 왜 기독교교육에 유대인 자녀교육이 필요한가). 
   서울: 아름다운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