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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 역사 및 전망/ 선교전략

맘사라 2014. 11. 1. 19:39


한국교회 선교 역사 및 전망 / 선교전략

2010/07/15 21:40

 

세계선교의 흐름 속에서 한인교회가 대처해야할 전략을 생각해보자.

 

 1907년 9월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한인교회는 설립초기부터 선교하는 교회이었다. 1907년 9월 평양신학교 제 1회 졸업생 일곱 명을 목사로 안수하여 조선 예수교 장로회 독노회를 조직하였는데 그 해 그 일곱 분의 목사들 가운데 한 분인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또 다른 한 분 한석진 목사를 1909년 일본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1909년 평양신학교 제2회 졸업생 8명이 목사로 안수를 받았는데 그들 가운데 한 분인 최관흘 목사를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톡에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그리고 1912년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을 때 54명의 한인 목회자들 가운데 박태로, 사병순 그리고 김영훈 목사를 중국 주재 선교사로 산동성에 파송하였다. 한일합방 후 매우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한인교회는 제주도, 일본, 시베리아, 산동, 만주 등 한반도 인근 나라들뿐 아니라 멀리 하와이에까지 선교사를 파송하여 주재국 외국인들과 해외 한인들에게 선교하게 하였다. 해방과 한국동란 후 매우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한인교회는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선교하는 교회의 전통을 지켜왔다. 그리고 1980년대부터는 폭발적인 교회성장, 경이로운 경제성장, 놀라운 이민성장, 세계 거의 모든 나라와의 외교관계 수립, 그리고 국민의 교육수준 향상에 힘입어 선교사를 받던 교회에서 선교사를 보내는 교회로 발전하였다. 2001년 2월 현재 세계 170여 나라에 9,133여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세계선교운동의 주 세력 가운데 하나로 성장하였다. 먼저 한인세계선교의 간략한 역사를 살펴보고, 세계선교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한인교회에 주신 자산은 무엇이며, 세계선교의 흐름 속에서 한인교회가 대처해야할 전략을 생각해보기로 하자. 

 

 

1. 한인교회의 선교역사 

 

가. 일제 식민통치하에서의 선교 

일본 식민통치하에서의 한인선교사역은 모두 독특하면서도 의미심장한 것이었지만 제주도선교 와 중국 산동성 선교는 한국교회가 펼친 첫 타문화 및 외국 선교로 매우 중요하다. 제주도 선교의 의미가 크고 중요하다고 하는데는 제주도 선교 자체뿐 아니라 순수한 외국선교 사역인 중국 산동성 선교가 가능하도록 도전이 되었다는 것이며, 산동성 선교가 의미심장하다는 것은 한국이 일본에 합병되어 국권을 잃은 어려운 시기에 피 식민지 백성들이 대국인 중국에 가서 펼친 모범적인 선교의 내용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본 식민 통치하에서의 선교를 다룸에 있어서 제주도 선교와 중국 산동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할 필요가 있다. 

 

1) 제주도 선교 

 

제주도 선교는 1907년 9월 17일 평양에서 조선 예수교 장로회 독 노회가 조직되었을 시작되었다. 조사, 장로, 전도사로서 사역하며 평양 신학교를 졸업한 일곱 사람 곧 서경조, 한석진, 송인서, 양전백,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이 한국 장로교회의 첫 목사로 안수를 받았는데 그 들 가운데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 선교사로 가겠다고 자원하게 된 것이다. 막 조직된 독 노회는 이기풍 목사의 청원을 크게 환영하여 받아들였고, 그를 한국 교회의 첫 타문화 선교사로 당시에 말과 문화가 달라 외국처럼 여겨진 제주도에 파송하게 된 것이다. 이기풍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보내기 위해 선교 실행위원회가 조직이 되고, 그와 함께 갈 한 두 명의 조사들을 후원하기 위한 감사헌금을 전국교회에 요청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국교회는 장로교 독노회가 조직되면서부터 선교하는 교회로서의 푸른 깃발을 세계에 펄럭이게 되었다 (Reynolds 1907:63, 164). 

 

백락준 박사는 미국 북장로교회 1910년 보고서를 인용하여 제주도 선교를 시작하게 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교회의 한반도 밖 선교사역은 독 노회가 조직된 1907년에 일찍이 시작되었다. 한국 노회가 정식으로 조직되었을 때 한국 [평양] 신학교 졸업생 일곱 사람이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다. 안수 받은 일곱 분의 목사들 가운데 한 사람인 이기풍 목사가 본토의 남해안에서 60마일[96km] 떨어진 웉팟트 섬 [제주도]에 한국교회의 첫 개신교 선교사로 가겠다고 자원하였다. 노회는 그의 청원을 받아들였고 선교사역 착수를 위해 선교 위원회를 임명하고 모든 교회를 명하여 신앙 전파 수행하기 위한 특별연보를 하도록 하였다" (백락준 저 "1910년부터 1932년까지의 한국 내 개신교 선교역사" 390페이지). 

 

이기풍 목사 이외에도 공식적으로 파송된 다른 선교사들, 남녀들, 학생들, 그리고 외국 선교사들이 제주도 복음화를 위하여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기풍목사는 제주도 복음화를 위한 첫 선교사이었을 뿐 아니라 중심 인물이었다. 총신 선교대학원 선교문제 연구소의 조사와 1907년과 1909년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회의록에 의하면 제주도에서 사역한 목사들로는 이기풍목사 외에 윤식명 목사, 최대진 목사, 최대선 목사, 장덕상 목사, 김창국 목사, 이창규 목사, 이도종 목사, 정순모 목사, 조상학 목사가 그곳에서 사역하였다. 여전도사로는 이관선 전도사가 1908년부터 1913년까지 평안 여선교회 파송으로 가서 사역하였고, 학생 선교사로는 김형재가 1909년에, 평신도로는 김창문이 1909년에, 김홍련이 1915년부터 사역하였다 (Hwal Young Kim, From Asia to Asia. Unpublished D.Miss. dissertatio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Jackson, Mississippi. 1993. p. 37). 이기풍 선교사는 많은 역경 가운데서도 성공적으로 제주도 선교를 감당하였으며 제주도 선교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30여 개의 교회를 설립하고 1934년에는 독노회가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제주도 선교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제주도 선교는 한국교회의 첫 타문화 선교였고, (2) 교회설립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복음의 빚을 갚는다는 뜻에서 한 선교이었고, (3) 본토에도 할 일이 많은 때 안수 받은 첫 일곱 목사들 가운데 한 사람을 떼어 보낸 희생적 사역이었고, (4) 전국교회가 기도와 물질로 동참한 선교였고, (5) 안수 받은 목사 뿐 아니라 안수 받지 않은 남녀 사역자들로 구성된 선교사 단에 의한 사역이었으며, (6) 교회구조와 선교구조가 함께 참여한 선교이었으며, (7) 성령의 나타나심에 따라 표적과 기사가 동반한 사역이었다. (박기호 1999:61). 

 

2) 산동성 선교 

 

한국교회의 중국 산동성 선교는 1912년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조직될 때 시작되어 중국이 공산화된 후 1957년 마지막선교사 방지일 선교사가 귀국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장로교회는 독노회가 조직되었을 때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던 것처럼, 총회조직을 기념으로 태국 북부지방이나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고, 1913년 세 명의 안수 받은 목사들, 곧 박태로, 김영훈 그리고 사병순 목사를 산동성에 파송하였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미국으로부터 첫 주재 선교사 (resident missionary)를 받은지 28년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한국교회의 중국 산동성 선교사역은 처음 파송받은 세 사람의 뒤를 이어 방효원, 홍승한, 박상순, 이대영, 김순호, 방지일 선교사로 이어지면서 지속되었다. 

 

김규식은 총회가 새로운 선교사역을 옛 노회의 해외 선교부에 의하여 이루어진 선교사역과 구분하기 위하여 결정한 사항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총회가 취한 가장 흥미로운 조치는 중국이나 시암 (Siam) 북부 지방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지금 까지 옛 노회 아래서 해외 선교부가 한 선교사역은 제주도 (웉파트), 블라디보스톡, 만주, 간도, 그리고 동경 유학생들 가운데서의 사역이었으나, 이것을 해외 선교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과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졌으니 실제 (해외 선교)시작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1912: 324). 

 

한국교회회의 중국에서의 사역은 선교지 결정부터 모든 사역이 중국인교회 및 서양 선교부와의 협조하에 이루어졌으며, 사역의 열매 또한 놀랄만한 것이었다. 한인 선교사들에 의하여 40개의 교회들을 설립하고 3개의 노회를 조직하였으며, 학교들을 설립하고, 현지인 지도자들을 훈련하였다. 

 

한국교회의 중국 산동성 선교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제주도 선교가 말과 문화가 달랐으나 정치적인 의미에서 한국 안에서 이루어진 첫 번째 타문화권 선교이었다면, 중국 산동성 선교는 외국 땅에서 행한 첫 번째 타 문화권 선교사역이었다. (2) 중국 산동성 선교는 본국 총회 선교부이 철저한 지도와 감독하에 이루어졌고, (3) 한국에서 배운 자치, 자립, 자전의 원리를 철저히 적용한 사역이었고, (4) 파송된 한국선교사들 간의 팀 사역이었으며, (5) 한국선교사들만의 독자적인 개척 사역이 아니라 중국인 교회에 가입하여 중국인들과 서양선교사들과의 협력하에 이루어졌으며, (6) 교회개척 사역뿐 아니라 의료사역, 교육사역, 문맹퇴치사역 등 종합적인 사역이었고, (7) 전국교회가 기도와 물질로 참여한 사역이었고, (8) 동양인에 의하여 동양에 복음이 전파되는 새로운 선교운동의 시작이었다. 

 

3) 일제 식민 통치하에서의 한국선교 요약 

 

일본에 의해 국권을 찬탈 당한 민족적 불행 속에서 한인교회는 1900년부터 1945년까지 255명의 교포 선교사를 8군데의 선교지에 파송하였는데 나라별로 보자면 만주에 172명, 일본에 32명, 시베리아에 21명, 제주도에 14명, 미국 (하와이 포함)에 9명, 중국에 4명, 몽고에 2명, 쿠바에 1명이었으며, 교단별로 보자면 4개 교단이 참여하였는바 장로교회가 146명, 감리교회가 46명, 침례교회가 16명, 그리고 성결교회가 14명, 미 분류 선교사 수가 30명이었다. 그리고 장.감.성 연합 팀으로 파송된 선교사수가 4명이었다 (김해성, 정혜경, 박경옥, 오영철, 초기 한국교회 해외선교 연구, 서울: 총신 선교문제 연구소). 

 

한국교회는 "주는 교회"였고 "감사하는 교회"였다. 그 장로교회는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되었을 때 그 교회의 일곱 안수 받은 목사들 가운데 한 분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이 일곱 분의 목사들 가운데 또 한 분인 한석진 목사를 1909년 동경에 파송하였다. 1909년에는 평양신학교 제 2회 졸업생 8명이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는데 그들 가운데 한 분 최관흘 선교사를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톡 선교를 위해 시베리아에 파송하였다. 그리고 1912년 한국 장로교회 총회가 조직되었을 때 총회를 조직한 큰 행사의 기쁨의 표시로 전국교회가 감사헌금을 거두어 세분의 목사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산동에서 중국인들을 위해 중국말로 순수한 "해외선교"를 시작하도록 파송하였다. 

 

당시 한국교회의 선교운동을 가능하게 한 영적 자원들로서는 복음주의적 신학, 청교도적인 신앙, 대부흥 운동을 통한 교회갱신 등이었다. 제도적 자원으로는 평양에 있던 장로회 신학교가 훌륭한 지도자들을 훈련시켰는데 목회 후보생들은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그리고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선교사 목사들로부터 도제교육 (apprenticeship)과 현장훈련 (on-the-job training)을 통하여 질적인 준비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적자원들로는 교회와 선교단체들, 남자와 여자들, 안수 받은 이들과 안수 받지 않은 이들, 여전도사들와 권서인들이 포한된 선교사단들 (bands of missionaries)이 선교지에 파송되어 함께 사역하였다. 선교사들은 동료 선교사들, 자기들이 일하는 나라 교회들, 그리고 현장에 있는 서양 선교사들과 팀을 이루고 협력하여 사역하였다. 산동에 간 선교사들은 불필요한 갈등과 사역의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중국 노회에 속하여 중국인 교회들을 개척하였다. 

 

식민통치 과정에서 막강한 정치적 이점들을 가지고 선교사역을 한 서양 선교사들과 달리 한국 장로교회 선교사들은 사도들처럼 막강한 정치적인 배경이 없이 선교 책임들을 감당하였다. 한국 장로교회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예수님의 삶의 양식을 실천하였으며 현지인들 처럼 살았다. 산동에 간 선교사들은 교회개척, 의료사역, 성경학교 훈련, 일반교육, 문맹 퇴치 전도, 그리고 다른 사역들을 포함한 종합적인 선교사역을 하였다. 해외 선교부가 선교사역을 관장하였으며 선교사들은 선교부의 세심한 감독 아래 사역하였다. 

 

우리가 한국 장로교회의 선교운동에 있어서 이 모든 긍정적인 요소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선교운동이 한국교회의 선교 내일을 위한 격려가 되는 표징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한국교회, 특히 한국 장로교회는 그 영적인 활력을 유지한다면 세계선교의 역군이 될 것이라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일제 식민 통치하에서의 한국교회의 선교운동은 몇 가지 약점들도 가지고 있었다. 교회의 일반 수입이나 선교비로 선교사들을 후원하지 않고 일년에 한번씩 '감사헌금' (thank offerings)을 거두어 그들을 후원하므로 가믐이나 장마로 농사가 잘 되지 않을 때는 선교비 후원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선교사들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다. 

 

나. 독립후의 선교 

 

한국교회의 저명한 교회사 학자 김양선교수는 해방후 10년을 '고난과 부흥'의 기간으로 요약하였다. 그는 한국 전쟁 동안 (1950-1953) 한국 장로교회가 북한 교역자 260명과 남한 교역자 40명을 포함하여 300여명의 순교자를 내었으며, 북한 교회 1,000개처 남한 교회 541개처를 합하여 1,541개처의 예배당이 폭격을 당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재난은 한국장로교회 안에서 영적 부흥이 일도록 하였다고 말한다 (김양선, 한국 기독교 해방 십년사, 서울: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교육부. 1956). 결과적으로 1950년 부터 1955년 까지 한국 장로교회는 교회개척운동을 벌여 1,200개처의 교회를 설립하였고 (전택부,한국교회 발전사, 서울: 기독교 서회. 1987), 고난과 부흥의 결과로 한국장로교회는 다시금 세계를 향한 선교사명을 깨닫게 되어 태국, 대만, 파키스탄, 이디오피아, 브라질을 포함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선교사역을 지속하였다. 1955년에는 최찬영선교사와 김순일선교사가 태국에, 1956년과 그 이후 계화삼목사와 김영진목사가 대만에, 1960년 전재옥선교사가 파키스탄에, 1968년에 박광자 선교사가 브라질에, 1968년 박희민 목사가 이디오피아에, 1970년대초 서만수, 서정운, 박창환 목사가 인도네시아에 파송하였다, 

 

다. 근래의 선교 

 

1980년대에 이르러서 한국 교회는 세계선교의 주요 역군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였다. 한국교회의 근래 선교 운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종전의 선교 운동과 달리 폭발적 교회 성장과 경제성장, 외교성장 등을 배경으로 호조건 가운데서 전개 되어오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 운동 자체로는 교단이나 선교단체 주도의 선교가 아니라 주로 1970년대에 접어들어 신학생들 주도로 일기 시작한 선교운동이었다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에 들어와 한국 선교의 동향 중 몇 가지 중요한 변화는 다음과 같다. 

 

1) 타 문화권, 특히 미접촉 족속 (Unreached People Group)을 위한 개척 선교 

 

197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 선교는 대다수가 해외 한인 교포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정 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순수하게 교포사역 만을 하는 선교사 수는 점점 줄고 1990년대 후반기부터 대부분의 한인선교사들이 타문화권사역에 종사하고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한국 선교사들이 미전도 족속을 위한 선교에 많은 노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 선교사의 40% 이상이 교회가 없는 미전도 지역에서 개척교회를 설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율은 1994년 통계의 29.2%에 비해서 많은 증가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루이스 부쉬 (Luis Bush)가 설정한 '10/40 Window' 지역에서 활동 중인 한국 선교사 숫자가 최소한 2,098명으로 47.7%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것이 입증된 것이다. 

 

2) 국내 자생 선교 단체들의 부상 

 

한국 선교사들의 소속 선교 단체를 살펴볼 때 주요한 변화 중의 하나는 국제 선교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선교사들의 비율이 점점 줄어들고, 국내 자생 선교단체에 소속된 선교사들의 수가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국제적인 선교단체에 속하여 사역하는 한인 선교사들이 많이 있지만 근래에 와서는 Global Partners, UBF, GMF. 바울선교회 등 국내 자생 선교 단체들을 통하여 파송되는 선교사 수가 늘고 있다. 

 

3) 교단 선교의 약진 

 

한국 선교사 가운데 최소한 28.4% 정도가 안수 받은 목사 선교사이며, 안수를 받지 않았지만 신학을 공부한 선교사가 최소한 11%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1994년 조사에서 교단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이 1.804명이었으나 1996년 조사에 의하면 58.1%인 2,558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렇게 신학 수업을 한 교단 선교사의 수가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독신 선교사의 비율은 1994년 20%에서 1996년 16%로 줄어들었고, 장기 선교사의 수는 1994년 91.2%에서 1996년 95.7%로 늘어났다. 이는 전임 선교사의 수가 1994년 76.1%에서 1996년 89.5%로 늘어난 현상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러한 교단 선교부의 활성화 현상은 신학교에서 대량 배출된 인력의 상당수가 해외 선교로 흡수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급 선교 인력을 제공한다는 의미와 교단 선교부의 전문화와 관리 체제의 강화라는 면에서 매우 긍정적인 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현상이 국내교회 성장의 침체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 되지 않을까라는 염려와 함께 소명을 받지 않은 선교사 배출이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선교사 선발, 훈련, 그리고 파송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2. 세계선교를 위한 한인교회의 자산 

 

세계 선교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한국을 독특하게 준비해 오셨다. 그것은 폭발적인 교회성장, 경제성장, 이민성장, 외교성장, 그리고 교육수준의 향상이다. 

 

가. 교회성장 

 

한인교회는 그 동안 그 유례를 다른 곳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폭발적인 교회성장을 이룩하였다. 1884년에 첫 개신교 선교사를 받은지 25년 만에 200,000의 결신자를 얻으므로 세계를 놀라게 하여 머지 않아 기독교 국가가 될 것이란 예견을 가능케 하더니 선교 100주년을 맞으면서 개신교 인구만도 국민의 20%를 차지하게될 정도로 큰 성장을 이룩하였다. 세계의 50대 대 교회들 가운데 23개가 한인교회라는 통계조사가 발표된 일이 있다. 한인교회가 가지고 있는 복음주의 신학, 순교적인 신앙, 열심 있는 기도, 희생적인 헌금, 전도의 열심, 선교의 열의는 세계 선교를 위한 저력임에 틀림없다. 

 

나. 경제성장 

 

세계선교를 위하여 하나님은 한인들의 교회성장과 함께 경제를 성장 시키셨다. 1997년 말 경제 위기 도래로 IMF 시대에 접어들기 전까지 한국의 GNP는 약 $10,000를 넘어섰고, 미국의 5대 무역 상대국이 되었으며, 세계 11대 경제 대국으로 꼽혔었다. "한국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에게 사용되는 기본 후원금만 계산해보면, 매년 432-540억원 [$48million-60million]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는 한 가정당 매월 120만-150만원(IMF이전) 으로 계산한 것이다. 여기에 일반 사역비와 특별 프로젝트비 그리고 선교단체들의 운영비를 감안한다면 훨씬 더 증액될 것이 분명하다" (강승삼1998:150). 

 

다. 이민성장 

 

신구약 성서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예루살렘에만 있던 유대인들 보다 어떤 이유에서였든 각 나라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들이 이방인의 빛이 되고 하나님나라 확장을 위해 요긴하게 사용되었듯이 세계 각국에 흩어진 500여만 명의 한인들(특히 이민 1.5세, 2세)은 그들이 어떠한 동기로 이민 길을 택하였던지 간에 세계선교의 중요한 역군들임에 틀림없다(행 11:19-21). 20세기 초 한국은 정치 사회적으로 매우 불행한 형편에 처해 있었다. 일본이 1910년 한국을 합병시킨 후 1945년 8월 15일 까지 식민 통치를 계속하는 동안 한국인들은 그들의 주권 뿐 아니라 언어와 이름까지도 빼앗겼으며 경제적으로도 착취를 당하였고, 당시 2천만 인구 가운데 1/3이나 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조국을 떠나게 되었다. 조동진 목사는 이 민족 대 탈출을 선교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면서 "이 탈출이 한국교회로 하여금 국경을 넘어 자국민을 복음화 하는 좋은 본을 보이게 하였다"고 하였다 (Cho 1983: 103-126). 

 

라. 외교성장 

 

교회성장, 경제성장, 이민성장과 함께 하나님께서 선교를 위하여 한국의 외교 성장을 허락하셔서 전에 적대 관계에 있던 공산주의, 사회주의 각국들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이제는 대한민국 여권을 가지고 못 들어가는 나라가 없다. 

 

마. 교육수준 향상 

 

선교사가 되기 위하여 상당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 동안 한인들은 다른 민족과 비교할 수 없는 각별한 교육열을 보여 왔다. 한국은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대학생 인구가 많다. 1986년 인구 10,000명당 대학생 인구가 미국은 546명, 한국은 353명, 독일은 212명, 그리고 일본은 202명이었다. (한국일보 L.A.판 1991년 2월 5일). 

 

 

3. 세계선교를 위한 한인교회들의 역할 

 

가. 한인교회는 서구 선교가 서구교회의 신학적인 좌경화 및 세속화와 함께 영적인 지도력을 잃게 되는 마당에 제삼세계 교회의 역할 증대를 필요로 하는 시대적 사명을 직시하고 세계의 변화와 선교계의 변화를 이해하여 상황에 맞는 선교 전략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나. 한인교회들은 선교가 일부 민족 주도의 선교에서 범 민족적 범문화적 국제적 선교 운동으로 되어가는 현실을 인식하고 지체가 되는 다른 나라의 교회들과 더불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세계 인구를 복음화 하기 위해 협력 및 동반자 사역을 해야 한다. 

 

다. 한인교회들은 선교사의 은사와 선교지의 필요에 맞는 사역을 하되 미 접촉 족속들 복음화를 우선 사역으로 하여야 한다. 

 

라. 한인교회와 선교단체들은 말로만 하던 복음전도의 방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상 생활에서 말과 행위로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모색하여야 한다. 

 

마. 한인교회 교단과 선교단체들은 급변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전통적인 선교 방법만으로는 복음화 할 수 없는 줄 알고 단기 선교사, 전문인 선교사, 비거주 선교사, 경제인 선교사 등 다양한 선교의 자원들을 확보하고 활용하여야 한다. 

 

바. 한인교회들과 선교단체들은 복음의 토착화를 막고 현지교회의 자립심을 헤치는 선교사 주도의 사역과 선교비 의존의 사역을 탈피하고 현지교회의 토착화를 위한 방법을 강구하여야 한다. 

 

사. 한인교회와 선교단체들은 정보 통신의 발달로 접근이 달리 접근이 불가능한 사람들에게도 인터넷 웹을 통한 사역의 가능성을 믿고 첨단의 정보 통신을 이용한 선교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한인교회는 그 설립 초기부터 선교하는 교회였다. 일제 식민통치 기간동안 암울한 가운데서한반도 주변국들뿐 아니라 멀리 하와이와 브라질에까지 선교사를 파송하여 해외주재 한인들과 타민족을 위한 선교사역을 펼쳤고, 독립 후에 남북 전쟁으로 국토가 초토화된 직후에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선교하는 교회로서의 전통을 지켜왔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폭발적인 교회성장, 경이로운 경제성장, 지속적인 이민성장, 교육수준의 향상을 힘입어 대대적으로 선교하는 교회로 탈바꿈하였다. 한인교회는 하나님께서 세계선교를 위해 한인교회에게 주신 자산들을 이용하고 그 동안 쌓은 선교의 경험을 바탕 위에 세계선교를 위한 위대한 기여를 해야한다. 급변하는 세계의 동향을 이해하고 효과적인 선교전략을 수립하여 세계선교발전에 독특하고도 위대한 기여를 해야한다. 

 

미국 Fuller 신학교 박기호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