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개신교 안에 널리 확산되고 있는 "관상기도"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은 그것이 성경에 나오는 "묵상"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관상기도"와 "성경의 "묵상"은 그 개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런데 오늘날 "관상기도"를 선전하며 권장하는 교계 지도자들은 그 근본 개념을 은폐하고 마치 "관상기도"와 성경의 "묵상"은 비슷한 것처럼 오도하고 있으며 따라서 현대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받아들이고 관상기도를 따라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술"과 "물"을 섞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술에다 물을 섞었는지 아니면 물에다 술을 섞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쨋든 물은 물이다"라는 식으로 "관상기도"를 선전하고 있다. 왜 기독교 안에 이런 현상들이 급속히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는가? 그것은 신앙의 표준과 면역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인데 다른 말로 하면 건전한 기독교 교리(sound doctrine)의 울타리가 무너졌기 때문이다(딤후4:3-kjv). 그래서 온갖 잡스러운 것들이 기독교 안으로 넘어들어와 혼합하면서 혼란을 일으키고 현대 기독교를 종교 다원화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말세적 관점에서 보지 아니하면 이런 혼란스러운 것을 의식할 수가 없을 정도로 교묘하게 성경을 왜곡하면서 다른 길로 유도하고 있다. "종교다원화", "종교통합", "에큐메니칼 운동"등은 다 같은 내용인데 그것은 "혼합주의"와 관계가 깊다. 기독교의 본질은 "혼합주의"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것을 혼합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말세에 하나님을 거역하여 "배도(배교)하는 일" 이다(살후2:3).
하나님은 "혼합주의"를 금지하셨다. 기독교 구속의 원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구약의 출애굽 사건이며,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 생활은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혼합주의"를 금지하셨고 그 금령은 오늘까지도 계속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염려스러운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출애굽 이전의 애굽의 풍속을 다시 본 받는 것과 또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그 땅의 풍속을 본 받을까 하는 염려였다. 그래서 모세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다.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fashion)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fashion)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18:3-4). 여기서 "풍속"이라는 히브리어 원형은 "아싸()"인데 "유행하다, 행동하다, 성취하다(fashion, do, accomplish)"의 뜻이 있다. (Harris-Archer-Waltke, Theological Wordbook of the OT, Vol.2, p.701a) 즉 유행을 따라 행동하며 만족한다는 복합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 민족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고 경고 하셨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당시 유행하던 우상문화(다른 종교 문화)를 본 받을까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구약성경 전체의 흐름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문화와 우상숭배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방 종교 문화를 좋아하다가 우상숭배를 시작하였고 결국 그 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것은 말세에 일어날 사건들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배반하는 배교의 일도 이와 무관하지 않고 반드시 다른 종교와 혼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오늘날 유행하는 관상기도도 이러한 관점에서 보지 아니하면 알쏭 달쏭하고 그것이 마치 묵상기도나 같은 것처럼 보이게 되는데 그것은 영적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미혹의 영에게 이끌리면 관상기도하면서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고 마침내 뉴에이지의 신과 접신하게 된다. 무방비 상태의 텅빈 마음에 떠돌아 다니던 악령이 반색을 하면서 들어가는 것이다(마12:43-45). 자신들은 그것을 성령체험으로 착각하고 기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meditation)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성도가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그의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여 마음에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반응하는 신앙의 태도를 의미한다. 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소원을 아뢰는 기도의 사람들에게서 많이 발견 되는데 대표적인 예를 들면 아래와 같으며, 히브리어 원어성경에서 "묵상"이라는 말이 명사로는 강세어 하기온( meditation), 동사로는 하가( meditate)라는 단어가 주로 사용되었다.
시편 1:2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히 하가) 자로다."
시편 5:1 =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심사(묵상: 히 하기온)를 통촉하소서(깊이 헤아려 주소서)."
시편 19:14 =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히 하기온)이 주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63:6 =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히 하가) 때에 하오리니"
히브리어 명사 하기온()이나 동사 하가()는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소리", "중얼거림", "묵상", "숙고", 또는 "속삭인다", "깊이 생각하다", "나타내다", "중얼거리다", "신음하다", "계획하다", 등 사용 범위가 다양하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meditation)의 히브리 원어 뜻은 한 인격체가 의식을 가지고 생각하며 감정을 표현하는 의식활동이다.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며 기도하는 본질 자체가 그런 의식활동 이다. "묵상하다(meditate)" 라는 히브리어 동사 하가()의 다양한 사용 실예를 보면 아래와 같다.
시편 35:28 =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히 하가)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37:30 =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히 하가) 그 혀는 공의를 이르며."
잠언 15:28 =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히 하가)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이사야 8:19 =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히 하가)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이사야 16:7 = "그들이 슬퍼하며(히 하가) 심히 근심하리니"
이사야 38:14 =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히 하가)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이사야 59:3 =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히 하가)"
개신교에 유행하고 있는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 or centering prayer)의 배경
관상기도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4세기경 수도원 수도사들의 명상훈련(the meditational practice of monasticism)에서 시작했다. 그 이후 로마 카톨릭에서는 수도사들의 경건과 기도훈련으로 사용해 왔으나 일반 신도들에게는 널리 보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전 세계 카톨릭 주교 2000여명이 모인 바티칸 제2공의회(1962-1965) 주교회의에서 예배의식 갱신을 위한 법(The Constitution on the Sacred Liturgy)를 제정하였는데 그 목적은 카톨릭의 예식을 좀더 쉽고, 간편하고, 이해하기 쉽게 하여 일반에게 널리 보급하기 위한 예배의식 개혁운동 이었다. (참고: What is the Liturgical Movement?) 그러한 예식개혁운동에 발 맞추어 개발하기 시작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수도사들이 수도원에서 사용하던 관상기도를 현대화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개혁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 한 자가 바로 현대 관상기도의 선구자라고 하는 토마스 키팅(Thomas Keating) 수도사 이다. 그는 관상기도를 전세계에 널리 전하기 위하여 관상확장활동기구(Contemplative Outreach Ltd.)를 창설하였고 관상기도를 홍보하기 위해서 Open Mind Open Heart, The Mistery of Christ, Intimacy with God, 등 여러 책들도 저술하였다.
토마스 키팅(Thomas Keating) 수도사는 로마 카톨릭의 전통적 관상기도를 현대화 하고, 타종교와 나누기 위하여 동양의 힌두교, 불교 수도사들과 만나 함께 초월적 명상을 연구하였고, (참고: Father Thomas Keating) 토마스 키팅 자신이 종교간 수도사 대화(The Monastic Interreligious Dialogue)기구의 회장이 되기도 하였다. (참고: Contemplative Outreach)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저서 Intimacy with God 에서 동양종교의 영적 지도자들을 강사로 초청하였고, 그 후 8년간 일년에 두번씩 특별수련회를 수도원에서 함께 가졌으며, 힌두교의 초월적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에 함께 심취 되었었다고 기술하였다(pp. 11-12). 그러므로 토마스 키팅이 현대화시킨 관상기도 사상은 흰두교, 불교, 뉴에이지 신앙행위와 흡사하기 때문에 힌두교에서 유래된 요가(yoga)를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 or Centering Prayer)에 적용하라고 추천하며, 바라는 바 영성 체험도 비슷하다. 토마스 키팅의 저서 Invitation to Love 에서 그는 "에너지 센터(Energy Centers)"를 언급하였는데 이 말은 뉴에이지 용어라고 한다. 뉴에이지에서는 인간에게 Chakras 라고 불려지는 7곱가지 에너지 센터가 있는데 능력의 기가 인간의 척추뼈를 오르내린다고 한다(Fr. Pennington, Awake in the Spirit, p. 97). 그리고 힌두교는 척추뼈 맨 아래 좌골 삼각지대에 "뱀의 힘(Kundalini Shakti = Serpent Power)"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힘이 상층 7에(Chakra) 도달하면 신비적 능력을 경험하고, 그 힘(serpent power)은 기적과 해탈(liberation)에 이르게 한다고 가르친다(Johnnette Benkovic, The New Age Counterfeit, p. 11). 토마스 키팅이 자신의 저서 Open Mind, Open Heart 에서 언급하기를 기도하는 사람이 관상기도를 오래 충분히 하면 "무아의 경지(no consciousness of self)"에 도달하게 된다(p. 73-74, 97, 114)고 했는데, 그 무아의 경지는 바로 힌두교나 불교의 해탈(liberation)이나 같은 것이다. 한국 교회가 이러한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 or Centering Prayer)를 도입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교인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다는 현실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현대판 관상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만나주지 않으신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마음으로 아무리 도를 닦고 초월적 명상에 잠겨도 소용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렘17:9).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속성 중에 하나가 "진리"이다(시31:5).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하라고 하였으며(사65:16),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맡으시는 분도 "진리의 하나님"이시다(시31:5). 뿐만아니라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며(거듭나게 하셨으며)(약1:18), "진리의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시며(요15:26), 진리로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신다(요17:17, 19). 그러므로 크리스챤들이 진심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진리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왜 그럴까? 진리의 말씀에 순종해야 우리의 영혼이 깨끗해 지기 때문이며(벧전 1:22), 영혼이 깨끗해 져야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가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증거하는가?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시 43:3)
여기서 "주의 성산과 장막"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진리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를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가까이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 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리로 거룩해져야 가능하기 때문이다(요17:17, 19).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4:24)
우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옛 습성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하고(엡4:22), 우리 자신이 (우리를 거듭나게 한) 진리의 말씀으로 새로워져야 한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그런데 마지막 때의 신자들은 진리의 말씀을 싫어한다고 하였고, 자신의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하였다(딤후4:3-4). 그래서 현대 크리스챤들은 진리를 싫어하고, 거룩한 생활을 싫어하면서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하나님을 체험하려는 모순에 빠져있고, 또 흥미롭고 그럴듯한 허탄한 것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시대를 분별하고 현실을 바로 파악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신앙의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진리의 말씀을 따라 거룩한 생활에 힘써야 할 때이며, 각자 자신을 위해서 정직하게 기도해야 할 마지막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