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및 선교 정보/성경공부자료

교회사-초대교회의 이단과 분파 운동

맘사라 2014. 3. 22. 23:02

교회사(20)-초대교회의 이단과 분파 운동

고난과 함께한 교회의 역사

이한규 목사

 

 

 

 

 

 
 

초기 교회의 이단들

콘스탄틴 황제가 313년 밀라노칙령을 선포하여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 초대교회는 약 280년 동안 여러가지 전쟁을 치러나가야 했다. 유대교의 시기와 방해, 교회를 없애려는 로마제국의 탄압, 그리고 이단의 침투와 분파 등에 대한 전쟁이었다. 박해가 교회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이라면 이단의 발흥은 교회 내부에서 오는 공격이었다.

당시 일어난 이단들은 대체로 세 가지 부류였다. 유대 전통에서 나온 율법주의적 이단, 그리스도철학과 동방의 이원론(二元論) 사상과 혼합된 데에서 나온 이단, 현실 생활을 무시한 신비주의적 가르침에 치중한 이단 등이었다.

유대교적 이단으로는 예수는 신격화된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에비온주의가 대표적이고, 헬레니즘과 영지주의에서 나온 이단으로는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부정하는 가현설(假現說, Docetism), 마르시온주의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리고 종말론적이고 신비적인 이단으로는 2세기 중엽에 등장한 몬타니즘이 있었다. 이들은 초기 교회에 홍수처럼 밀려온 매우 위험하고도 강력한 도전이었다.

교회의 신상을 위협하는 운동이나 가르침이 나타났을 때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것을 반격하고 성경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입각해서 정통교리를 정립하려고 했고, 때로는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그들을 정죄하기도 했다. 각종 이단적 교리들이 교회 내에 침투했을 때 교회의 지도자들은 당연히 위기의식을 느꼈으며 힘을 합하여 대처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도 철학자들과 이단자들로부터 교회를 지키려는 노력을 경주했지만 교회들이 연합하여 대처해 나가도록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기도 했다.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이단 종파 몇 가지를 소개한다.

 

에비온파

   
 

에비온주의는 사도 시대의 이단으로, 유대교적 율법주의적인 이단이었다. 초대 교회 구성원들 중에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전에 믿던 유대교적 요소를 버리지 못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유대교의 틀 안에서 견지하려고 했다. 그로 인해 에비온주의는 초기 기독교에 많은 혼란과 지장을 주었다.유대인 기독교인들 중에 몇몇은 자신들을 에비온(Ebionites)이라고 불렀다. 에비온은 '가난한 자'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 말로, 이러한 명칭은 특별히 유대교의 사두개파 사람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성도들이 대부분 가난했던 것을 비꼬아 부른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에비온파는 분파를 형성하여 율법의 준수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율법과 유대인의 전통 위에 기독교를 이식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바울이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의 사도성을 부인했고, 바울이 이방인들도 기독교도로 인정했다고 유대교를 배신한 배반자라고 불렀으며, 따라서 바울의 서신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함으로써 교회에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에비온주의자들은 한 마디로 유대교적 율법주의자들로, 기독교의 유대주의화를 주장했던 이단이었다.

 

영지주의(靈知主意)

영지주의는 아주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간단히 정의하여 말하기 어렵다. 영지주의(Gnosticism)는 고대 그리스어로 '앎, 깨달음, 비밀스런 지식을 소유한 사람' 등의 뜻을 가진 그노시스(gnosis)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영지(gnosis)는 일반적인 의미의 지식이 아닌, 지성적인 이해를 넘어선 실재(實在)에 대한 통찰력, 혹은 신비한 영역이나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지슥을 의미한다. 영지주의적 계시는 이성의 힘으로는 얻을 수 없기에 철학적 계몽이나 기독교의 계시와는 구별된다.

1945년, 파코미우스(Pachomius, 292~364)가 최초의 수도원을 설립했던 이집트 북부의 한 작은 촌락 나그함마디(Nag Hammadi)에서 영지주의자들이 400년경에 묻은 것으로 보이는, 파피루스 코덱스 13권이 들어 있는 밀봉된 단지가 발견되었다. 다량의 이 문헌이 발견되면서 영지주의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영지주의는 대개 1세기 말에 기독교 교리, 지중해 연안의 그리스 철학, 그리스-로마의 신비종교, 동양 종교들의 이론과 사상을 절충, 혼합하여 만든 기독교 이단으로 물질과 육체를 죄악시하고 영(靈)을 높이 평가하는 종교적 철학적 경향 혹은 주의를 말한다. 영지주의는 2세기 초반 비교적 안정된 사상 체계를 가짐으로써 호소력 있는 종교가 되었고, 약 150년간 전성기를 누리다가 3세기 후반부터 쇠퇴하였으며, 4세기경에는 그 사상이 마니교에 흡수되면서 한 시대를 풍미하던 영지주의는 사실상 사라졌다.

모든 영지주의자들은 물질적 창조를 악한 것으로 간주하고 구원은 영적인 영ㅇ역에만 국한된다고 여겼다. 그들에 의하면, 신비한 영역에서 오는 신적 존재의 섬광(spark) 또는 씨앗(seed)들이 구원받기로 예정된 어떤 영적인 개인들의 몸 안에 주입되었다. 이 영적인 자들은 자신의 기원(起源)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불완전한 육체에서 해방되고 지구를 탈출하여 본래 그들이 있었던 천상의 시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일종의 패스워드(password)와 같은 영지가 필요했다. 모든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상을 탈출하여 저 세계로 돌아가는 구원의 여정을 상정(想定)했다. 즉, 구원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특별하고 신비한 지식, 걔달은 자만이 이를 수 있는 그노시스(영적 지식)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지식은 특별한 영적 계급에 속한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고, 그들만이 최고 신의 빛의 경지에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이 육체라는 물질세계에 속박된 상태에서 해방되어서 영혼이 기원한 빛의 세계, 곧 초월적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여겼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비밀한 지식이 요구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이 세상에 영지를 전하기 위해 오신 천상이 계시자 정도로 여겼다. 또한 물질과 육체는 악하다는 신념에 따라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부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육체는 기적적으로 육체처럼 보였을 뿐이며, 예수님의 고난이나 죽음이나 부활은 실재적인 것이 아니다'는 가현설(假現說)을 주장했다. 그들의 사상은 이원론적 헬라 철학을 근간으로 하여 이집트와 페르시아, 동방의 신비 종교 사상을 혼합한 것으로, 2세기 내내 기독교에 심각한 위협이었다. 하나님의 창조,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부활 등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페할 것을 주장한 것(딤전 4:1~3)이나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주장한 것(딤후 2:16~18),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에 대한 언급(요일 4:1~3, 요이 1:7) 등은 영지주의적 사상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사도 요한은 그들을 가리켜 거짓말하는 자들, '예수를 주로 시인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했다(요일 2:22, 4:2~3).

 

마르시온주의(Marcionism)

마르시온주의는 2세기 중반에 나타난 가장 위협적인 이단이었다. 마르시온이 쓴 작품들은 현존하지 않지만 터툴리안을 비롯하여 그를 비판한 교회 지도자들의 자료들을 통해서 그의 사상을 잘 엿볼 수 있다. 

마르시온은 85년경 흑해 연안에 있는 항구 본도(Pontus)에서 부유한 선박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성스러운 처녀를 미혹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교회의 감독이었던 그의 부친은 그를 교회에서 추방시켰다. 140년경 그는 쉬프스리더(Schiffsreeder)의 초청을 받고 로마로 건너가 그곳 교회에 거액을 헌금하여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가려 하였다. 로마에서 그는 크레도(Credo)라는 사람의 영지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았고, 유대교와 물질세계를 증오했던 그는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키며 크레도의 사상을 구체화시켰다. 그가 이단적 가르침을 시작하자 교회에서는 144년 그를 출교했다. 마르시온은 곧 독자적으로 교회를 세워 많은 추종자를 얻었으며, 마르시온 교회는 거의 1세기 동안 활발하게 활동했다.

   
 

마르시온은 극단적인 바울 추종자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유대주의자들로 여겨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직 바울만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한 진정한 사도로 여겼다. 그리고 그는 구약과 신약을 분리시켜서 구약 성경은 유대인의 역사서요, 율법일 뿐이라고 여겼다. 또한, 구약의 신(神)은 지고한 하나님이 아니라 무지와 분노와 복수의 마음을 지닌 열등한 창조 신에 불과하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으로 충만한 참 하나님으로 우주적 구세주인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으로 보았다. 마르시온이 정경(正經)으로 인정한 것은 바울의 10개 서신과 누가복음의 편집본이었다. 이것을 가리켜서 '마르시온의 정경(Marcionite Canon')이라고 부른다.

마르시온은 영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육체를 지니지 않은 영적 존재라고 가르쳐 그리스도가 '참 인간'이었음을 부정하는 가현설을 주장했다. 그는 육체의 부활은 없고 최후의 심판도 없다고 했다. 또 물질과 육체는 악한 것이므로 육식이나 부부생활을 금하는 염격한 금욕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시온은 160년경에 죽었지만 마르시온의 추종자들은 이후에도 여러 세가 동안 활동했다.

마르시온의 성서 편집에 자극을 받은 초기 교회는 성경의 정경화(正經化) 작업을 촉진했고, 393년 북아프리카의 히포 회의와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27권의 신약성경 정경 목록을 확정했다.

 

몬타누스주의(Montanism)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면서 신앙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속히 이뤄지리라 여겼던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자 뜨거원던 종말 신앙은 점점 퇴색했다. 몬타누스주의는 이처럼 신앙이 약화되고 경직되는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났다. 

이 운동은 이방 종교의 사제였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몬타누스가 160년경 소아시아 프리기아에서 성령이 자신에게 임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몬타니즘 운동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자 그리스도를 인정했고, 교리적인 면에서 영지주의나 마르시온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몬타누스의 잘못된 견해 때문이었다. 몬타누스는 자신의 가르침을 새 예언(new prophecy)'이라고 하면서 방언과 열광적인 엑스터시의 체험을 강조했다.

몬타누스는 그를 통하여 성령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자신과 그를 돕는 두 여사제 프리스킬라와 막시밀라를 통하여 성령은 말씀하신다고 했다. 그들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프리가이 지방의 페푸자(Pepuza)라는 도시 근처에 세워지게 되어 있다고 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일에서 떠나 페푸자로 가서 종말을 기다려야 된다고 했다. 그들은 임박한 종말을 대배하면서 결혼을 금하고 금식과 엄격한 금욕생활을 실천하였으며 순교를 장려했다.

3세기에 들어서 몬타누스주의 운동은 큰 힘을 얻었는데, 그것은 후대에 서방 교회 신학의 시조라고 불리는 카르타고의 터툴리안이 이 운동의 염격한 도덕 생활과 금욕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일시 합류했기 때문이다.

몬타누스주의자들은 초기 교회의 종말론적 긴장을 되살렸고, 임박한 종말에 대한 확신과 성령의 특별 계시를 강조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소아시아 교회의 감독들은 160년 직후에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177년 몬타누스를 이단으로 정하였고, 교회의 결속을 위하여 감독의 지위와 권한을 강화시켰다. 이것이 교회 역사상 최초의 공회(Symod)였다.

그 후 비슷한 유령의 성령 운동이나 예언 운동이 계속 나타났으며, 사도적 신앙을 계승하려는 교회가 계속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이러한 여러 이단들의 활동으로 부터 진리를 수호하고 성도를 보호하려는 여러 움직임을 보였다. 그것은 교회들의 연합, 정경(正經)과 교리의 확립, 이단자들에 대한 정죄와 축출 등으로 나타났다.